•  여섯 번째 주제 : 동네 


  [동네 친구], 데킬라뮬

 

  오늘도 발자국 소리에 잠을 깬다. 나는 서둘러 어두컴컴한 그 아래를 벗어난다. 간밤에 누구에게서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던 보금자리가 곧 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라질 것이다. 가끔 운이 좋으면 이 지붕이 이동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러는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에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면 우선은 피하는 쪽이 좋다.

  하품을 연신 뿜으며 햇살 아래로 나온다. 털이 뽀송이 마르는 느낌에 기분은 좋지만 뱃속이 허해서인지 기운은 없다. 일주일이 넘게 그녀가 통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가득 채워지던 밥그릇이 내내 비어있다. 둘 중 하나겠지. 내가 동네 바깥으로 산책을 나간 그 몇 시간 사이에 그녀가 이사를 갔거나, 아님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그렇다 한들 상관은 없다.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게 처음도 아니고. 다만 그간 편안히 배를 채울 수 있던 지난 반년의 시간이 그리워질 뿐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인간도 조금은 그리워질 것 같다. 그녀가 이대로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녀와의 첫만남은 여느 다른 인간들하고는 달랐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를 보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거나 아님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는다. 그건 내가 보통은 어딘가에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거나, 햇볕을 쬐고 있거나, 아님 어딘가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쓰레기봉투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내 소리를 듣고 그녀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녀의 놀라는 소리에 아주 놀라고 말았는데, 보통 내가 음식을 구하는 모습을 인간들이 발견할 경우 뒤이어 대개는 나쁜 일들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벗어날 때까지 욕설을 듣는다든지, 무언가 딱딱한 것에 맞는다든지 하는. 하지만 그녀는 이후에 딱히 별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시선이 더 오래 이어지기 전에 재빨리 도망쳤지만.

  그 이튿날이었다. 먹을 걸 구하러 다시 쓰레기 더미로 가는 길목에서 새것으로 보이는 밥그릇과 물그릇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함정인가? 지난번 내가 쓰레기봉투를 뒤진 것에 대한 보복인가? 나는 그리로 갈 생각이 없었다. 여하튼 그녀는 다른 인간들하고는 달랐다. 내가 멀찍이 떨어져 그냥 밥그릇을 노려보고 있자 그녀는 갑자기 물그릇을 들더니 그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모금 벌컥 마시고는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설마 밥그릇에 든 것도 먹을 생각인가. 한 입이라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우선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입 먹는 순간 모든 의심은 사라졌다. 밤거리를 전전하며 구했던 음식들에 비하면 훨씬 질 좋은 맛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물이 적어졌다 싶을 때 더 채워주기까지 했다.

  식사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매일 저녁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에 그녀는 항상 같은 자리에 밥그릇과 물그릇을 놔두었다. 물그릇은 낮에도 자주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밥을 먹기 시작할 때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나를 야옹이나 나비 같은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그냥 나의 배를 채워주고, 가끔씩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녀의 그런 거리두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다른 인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식사 공급이 끊기는 걸 막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예쁘게 몸 단장을 하는 데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루 이틀 밥그릇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주일이 넘도록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배가 고프다는 감각 이후에 찾아온 건,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것 같은 불쾌한 감정이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다가 돌을 맞는 것과 같은 어떤 나쁜 일이. 

 

  우선은 먹을 것을 찾으러 돌아다니기 전에 부족한 잠을 먼저 채워야 했다. 햇살이 좋으니 공원 덤불 안에 누워 있고 싶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우연. 그녀다. 이 공원에서 그녀를 본 건 처음이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공원이지만 그녀가 이곳을 지나다니거나 여기서 운동을 하거나 하는 장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심지어 그녀는 어떤 남자와 함께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남자인가?

  여자가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처음 본다. 아니, 말하는 거라기 보단 고함지르는 것에 가깝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여자가 돌아섰을 때, 남자는 갑자기 여자를 끌어안는다. 여자가 몸부림을 치다가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남자는 그녀로부터 떨어진다. 벌게진 얼굴과 일그러진 표정. 인간들이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다. 그녀는 화가 났다. 아니, 몸은 잔뜩 움츠러져 있는 걸 보니 겁을 먹은 건가? 내가 일주일 간 제대로 된 밥을 못 먹고 있는 것이, 저 남자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직감과 함께, 번뜩 기억이 스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밥그릇을 채워줬던 날. 발에 무언가가 채이는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땐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그렇게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도 저 남자였을까? 지금처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

 

  해가 지고 있다. 그녀가 이사 간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오늘 저녁은 그녀 집 앞을 어슬렁거려 보기로 한다. 나는 그녀가 사는 빌라 맞은 편 담벼락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평소 밥을 주는 시간이 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볼 것이다. 길거리에 오가는 발걸음이 뜸해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좀이 쑤셔온다. 계속 기다려봤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담벼락 아래로 아까 그 남자가 지나간다. 역시나 그녀가 사는 빌라 앞에 멈춰 선다. 남자는 무언가를 귀에 대고 말하기 시작한다. 남자의 목소리는 작았다가 커졌다가, 느려지기도 했다가 사납게 빨라지기도 한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가, 별안간 목소리가 그친다. 남자는 그녀가 사는 집 쪽으로 성큼 걸어가고 있다. 그를 그대로 놔두면 정말 영영 그녀를 못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는 담벼락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그의 발을 향해 돌진한다.

 

  경찰차에 실려가기 전 남자는 핏자국을 남겼고, 다행히 그건 그 남자 자신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피의 쇳맛에 기분이 영 좋진 않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가 내 밥이 든 그릇을 들고 나오는 중이니까.

  고마워, 친구야.

  그녀가 나에게 한 첫 마디였다. 이젠 밥을 먹는 동안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다음 주제는 [골목길] 

  •  믹스키트는 [골목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Posted by 데킬라뮬
:

 

  •  [작업 노트] 이어 쓴다는 것 

 

  스파이시 만다린의 첫 번째 프로젝트 <이어쓰기>가 어느덧 중반에 다다랐다. 남은 다섯 회차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에서 데킬라뮬과 믹스키트는 지금까지의 작업 방식을 공유하고 이어쓰기 활동을 되짚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 이어쓰기 리스트 [괄호 안은 주제]
  1.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 믹스키트 [스파이시 만다린]
  2. 도망치는 골목에서, 데킬라뮬 [도망자]
  3. 해 질 녘, 에서, 믹스키트 [해 질 녘]
  4. 세상의 모든 롱디들에게, 데킬라뮬 [포옹]
  5. 거기 있(었)다, 믹스키트 [만남]

 


  •  데킬라뮬 & 믹스키트 좌담 

 

 

  시작

 

 

  데킬라뮬 (이하 데) : 저희의 스파이시 만다린 첫 번째 프로젝트로 선정된 것이 바로 이어쓰기였는데, 그걸 제안한 게 바로 믹스키트님이었잖아요, 어떤 이유에서 이런 방식의 이어쓰기를 고안하게 되었나요?

 

  믹스키트 (이하 믹) : 데킬라뮬님과 저의 공동 작업 카테고리(스파이시 만다린)가 만들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공동'의 작업을 만들 수 있을지, 어떠한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게 되었어요. 두 개의 세계가 합쳐진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래서 두 세계를 온전히 유지하며 공동의 작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게 '이어쓰기'고요. '이어쓰기'에서는 데킬라뮬님과 제가 번갈아 가며 글을 쓰는데요, 타인이 만든 세계, 서사, 인물 등을 연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前) 사람이 쓴 글 속, 그 사람이 생각하는 중요한 요소(주제)를 전달받은 후, 그 주제에 관해 자신이 쓰고 싶은 걸 쓰면 되거든요. 각자의 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둘의 세계가 연결되는 순간을 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데킬라뮬님은 처음에 '이어쓰기'를 제안받았을 때 어떠셨나요?

 

  데 : 우선은 한 번도 이어쓰기라는 형식으로 글을 연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새롭다는 느낌이었어요. 혼자서 글을 정기적으로 써보려 시도했던 적은 많은데, 주제부터 매번 혼자 정해야 했었기에 늘 비슷한 고리 안에 갇혀 있는 기분이더라고요. 하지만 스파이시 만다린의 이어쓰기는 상대방으로부터 주제를 전달받는 방식이라, 제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로 글을 써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좋았어요. 또, 상대방 글 마지막에 적힌 주제를 읽을 때면 매번 편지를 받는 설레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럼 믹스키트님은 첫 번째 주제 스파이시 만다린을 받고 어떠셨나요. 굉장히 막막했다고 들었는데요.

 

  믹 : 맞아요. 정말 막막했어요. 데킬라뮬님이 정해주신 첫 주제가 '스파이시 만다린'. 저희의 이 창작 플랫폼 이름과 같은 거였어요. 아까 제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두 세계 모두 공존하는 단어였죠. (스파이시와 만다린? 처음에 플랫폼의 이름이 정해졌을 때에도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라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스파이시 만다린'이라는 단어가 꼭 지옥으로의 초대장처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주자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요. 결국, 많은 고민 끝에 글을 완성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글을 쓰게 된 것 같아 기분도 좋았습니다.

 

  데 : 맞아요, 저도 오랜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글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답니다.

 

  믹 : 그럼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이어쓰기

 

 

  믹 : '스파이시 만다린'으로 시작된 '이어쓰기'잖아요. '이어쓰기'에서는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주제'가 핵심이 되는데, 데킬라뮬님은 자신의 글에서 전달할 '주제'를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저는 제 글을 마무리 지은 후, 글 속 중요 단어보다는 데킬라뮬님과 어울리는 단어, 데킬라뮬님이 (이 단어에 대해) 쓰면 재미있는 글이 탄생할 것 같은 단어를 선정하거든요.

 

  데 : 저 역시 믹스키트님이 쓰면 어떤 글이 탄생할까 궁금해지는 단어들을 선정하려고 하는데, 다만 저는 제 글 속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 같아요. 제가 받은 주제 다음으로 중요한 단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라고 할까요. 사실 처음에는 그 부분 때문에 주제를 정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받은 주제를 생략하고 나면 딱히 눈에 띄는 단어가 없어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상대에게 주는 단어를 선택하는 기술도 늘어가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궁금해요. 지금까지 나온 주제 중에 믹스키트님 마음에 가장 들었던 주제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믹스키트님이 저에게 준 주제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믹 : 주제를 정하는 게 어려우셨군요. 저는 항상 데킬라뮬님께 주제를 받을 때 '와! 내가 (데킬라뮬의) 글을 읽으며 상상했던 이미지 중 핵심 이미지, 단어를 잘 선택했구나!'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특히나 '해 질 녘'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제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랐고요. (깊은 고민 끝에 선택된 소중한 주제로 글을 쓸 수 있어 기뻤답니다!) 

  그러고 보니 여러 주제가 있었네요. '스파이시 만다린', '도망자', '해 질 녘', '포옹', '만남'. 모두 아끼는 단어라 선택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말해보자면, '해 질 녘'과 '포옹'인 것 같아요. 데킬라뮬님이 쓰신 '도망치는 골목에서' 속 화자는 결국 해 질 녘을 맞이하게 되고, 카레를 만들어 먹잖아요. 저는 그 장면을 너무나도 좋아하는데, 그 해 질 녘의 장면 속 '해 질 녘'이라는 단어, 이미지가 선택되어 저에게 오고, 그걸로 글을 쓰는 게 너무나도 좋았어요. 저의 '해 질 녘'의 세상을 만들고 싶기도 했고, '도망치는 골목에서'의 화자와 함께 조금 더 걸어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해 질 녘, 에서'를 쓸 때 '도망치는 골목에서' 속 화자를 떠올리며 썼던 것 같아요. 그 화자가 더는 외로워하지 않도록 자신을, 타인을 포옹할 수 있도록 글을 썼고요. 그리고 그 '포옹'이 데킬라뮬님께 닿아 새로운 '포옹'이 되어 온기가 퍼지는 걸 바라보는 게 뜻깊었고요.

   데킬라뮬님께는 어떤 주제가 가장 기억에 남았나요?

 

  데 : '해 질 녘, 에서'를 읽으면서 어쩐지 도망치는 골목에서의 화자가 겹쳐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믹스키트님 바람대로 그 화자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라 확신해요.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쓴 글을 받았으니 말이에요. 

  저 역시 어떤 것 하나 빠트릴 수 없이 모든 주제가 좋았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포옹'이 아닐까 싶어요. 원래도 발음할 때 느껴지는 포근한 기분 때문에 좋아하는 단어였는데, 그걸 주제로 받으니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기대가 되는 동시에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좋아하는 주제를 받으면 더욱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는 과정도 다른 때보다 더 길었고, 개인적인 감정을 풀어 쓰다 보니 종종 문장을 이어나가는 게 힘겹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렇게 완성된 글이라그런지 저에겐 가장 기억에 남는 주제가 되었답니다.

  저는 주제를 받으면 그 주제에서 이야기를 도출해내는 과정이 아직까지도 조금 어렵게 느껴져요. 단어로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거기서 풀어낼 수 있는 갈래가 너무 많으니 더 고민이 된다고 할까요. 믹스키트님은 주제를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나가시나요?

 

  믹 : 저도 주제를 받는 순간에 막막해져요. 한 단어에 저의 다양한 생각이 마구 달라붙거든요. 그래서 가장 먼저 그것 중 무얼 선택하면 좋을지 열심히 고민합니다. 결국, 제가 선택하게 되는 건 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겁니다. 최근의 고민, 생각 등을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할 때 저의 글, 저의 세상을 구축하기 쉬워지더라고요. 낯선 곳(주제)에서 헤매는 시간도 줄일 수 있었어요.  그건 제가 살아내고 있는 세계일 테니까요.

  저는 주제와 관련된 저의 고민, 생각 등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쓴 ‘이어쓰기’가 대부분 저의 실제 경험과 닿아있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의 고민, 생각 등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항상 길을 잘 찾는 건 아닙니다. 저로부터 시작된 건 가끔 저라는 문턱에 막히게 되거든요. 내가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는 건가, 나의 이야기와 세계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들이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다시 한번 데킬라뮬님이 선택한 주제로 돌아갑니다. 그 주제를 오랜 시간 바라보며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고 합니다. 데킬라뮬님의 힘을 받게 되는 거죠. 그 힘을 느끼게 될 때 저는 새로운 길목에 서 있게 됩니다.

  데킬라뮬님의 작업 방식도 문득 궁금해지네요. 제가 선택한 주제를 받을 때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 어려움을 깨고 데킬라뮬만의 따듯한 이야기를, 세계를 만들어내시나요? 데킬라뮬님의 ‘이어쓰기’ 방식을 알려주세요.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데 : 나에게서 시작된 이야기가 다시 나라는 문턱에서 막힌다는 게 공감이 되네요. 그렇지만 그중 하나의 이유가 '누가 내 이야기를 궁금해한다고', 이런 고민이라면 앞으로는 그런 고민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저 역시 믹스키트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독자 중 한 명이니까요. 그리고 믹스키트님의 이야기를 늘 흥미롭게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저 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확신해요.

  이어쓰기의 방식이라면, 출발하는 지점은 저에게 있어서도 나와 가까운 이야기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그리 선호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스파이시 만다린의 이어쓰기를 쓸 때만큼은 제 이야기에서 많이 착안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항상 에세이 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인지 이어쓰기에 올라온 글들은 수필과 창작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저는 주제를 받고 가장 먼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도망자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는 가장 먼저 도망을 치는 사람, 그 사람에게서 보이는 불안정하고 어딘가 쫓기는 듯한 모습과 같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을까? 어째서 도망치고 있는 걸까? 이런 식의 질문으로 살을 붙여나갔어요. 그렇게 질문과 답을 반복하며 어떤 내용으로 글을 지을지 결정합니다.

  믹스키트님도 저도 상대방에게서 받은 주제에서 시작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이어쓰기의 방식에서 오는 장점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에게는 매주 어떤 미션을 받는 기분이라 그게 약간의 스트레스가 되면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해 보는 기회가 되기도 해요.

 

  믹 : 저의 이야기를 애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데킬라뮬님의 ‘이어쓰기’를 정말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업로드 날만을 고대하고, 업로드 당일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읽기 시작한답니다. 

  맞아요. ‘이어쓰기’에 올라오는 글들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데킬라뮬님을 사적으로 알고 있어서 그런지, 데킬라뮬님의 ‘이어쓰기’를 읽을 때 무언가 반갑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그 지점이 흥미로우면서도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나와 내 글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고, 그 거리감을 적절히 조절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데킬라뮬님의 글을 읽을 때도 (데킬라뮬님과 가까운 관계이기에) 거리를 만든 후에 읽으려고 하고요. 그게 쉽게 되지는 않지만요.

  ‘이어쓰기’의 방식에서 오는 장점은 언제나 느끼고 있는 거지만 아무래도 ‘연결’ 아닌가 싶어요. 타인이 정한 주제를 전달받아 글을 쓰는 행위, 즉 '연결'이 굉장히 기묘하더라고요. 내가 가보지 못한 어떠한 세계, 그곳의 배경과 규칙, 여러 사람, 공기 등을 경험할 수 있었거든요. 꼭 어딘가로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타인의 세계와 나의 세계의 ‘연결’이 필수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만약 그러한 연결이 필수였다면 자유롭지 못했을 거예요. 또한 타인의 세계를 소중히 지켜내는 것만이 '이어쓰기'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을 거예요.

  단 하나의 단어로만 연결된 상태로 새로운 세계를 창작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당연히 데킬라뮬님의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어요. 그 세계에서 탄생하게 된 단어니까요. 하지만 그 영향이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단어로 우리가 단단히 연결되어있다고 느낄 수 있었기에 든든했습니다. 데킬라뮬님의 세계가 저의 글 속 단어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그랬고요. 그래서 우리의 ‘이어쓰기’의 ‘연결’이 기묘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업로드된 5개의 세계가 개별적이면서 연결되어있으니까요. 

  ‘스파이시 만다린’의 세계, ‘도망자’의 세계, ‘해 질 녘’의 세계, ‘포옹’의 세계, ‘만남’의 세계에 모두 가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또한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에 사는 도망자가, 해 질 녘에, 지금은 만나지 못하는, 누군가와의 포옹을 상상하고 있는 순간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데킬라뮬님께는 ‘이어쓰기’가 어떠한 의미였나요? 그 의미를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계속쓰기

 

 

  데 : 저에게 이어쓰기는 여행 같아요. 믹스키트님이 세계를 방문한다고 표현하셨듯이, 저 역시 매번 글을 읽을 때마다 낯설고도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거든요. 쓸 때도 마찬가지고요. 이제 저희에게 할당된 이어쓰기 속 글이 다섯 편 남아있는데, 믹스키트님이 앞으로 이어쓰기 안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방향성이나 주제 같은 것이 있을까요?

 

  믹 : 다섯 편밖에 남아있지 않다니 벌써 아쉬워요. 저에게는 두 편의 글이 남아 있는데요, 남은 이어쓰기 안에서 제가 도전해보고 싶은 건 명확한 사건을 가진 이야기를 만드는 거예요. 이야기 속에 사건을 만드는 건 저에게 아직 어려운 일이거든요.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 그 사건과 함께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글을 간절히 쓰고 싶어요. 

  다음 [이어쓰기 6]의 주제가 '동네'인데, '동네' 다음에 선택될, 제가 쓰게 될 주제가 지금부터 기다려지는데요. 데킬라뮬님께는 세 편의 글이 남았는데, 남은 여행의 목표 같은 게 있으신가요?

 

  데 : 저는 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물을 창작해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낯선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다양한 갈등이 부딪히는 이야기 같은 것들도 써보고 싶고요. 물론 이어쓰기 프로젝트가 아닌 개인 프로젝트나 다른 기획 프로젝트에서도 이런 시도들은 계속할 수 있겠지만, 이어쓰기가 마무리되기 전에 한 번쯤은 그런 톡톡 튀는 글을 써보고 싶네요.

 

  믹 : '스파이시 만다린'으로 시작하게 된 이어쓰기가 어떠한 세계에서 끝나게 될지 정말로 궁금해지는 순간이에요. 데킬라뮬님과 함께 이어쓰기를 하며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어, 두 세계의 연결을 느낄 수 있어, 우리의 여행을 떠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세계를 확장하며 다섯 번의 여행을 떠날 예정이니 저희의 '이어쓰기'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오늘 데킬라뮬님과  '이어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난 시간을 천천히 짚어보았는데요. 그 시간이 저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매주 수요일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데킬라뮬님은 오늘의 대화 어떠셨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데 : 지금까지 믹스키트님이 이어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에 접근했는지, 제가 잘 몰랐던 뒷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정말 뜻깊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이라던가 <해 질 녘, 에서>와 같이 믹스키트님의 좋은 글들을 더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란다는 거예요. 저만 보긴 아까운 글이니까요. 이번 대화를 통해 앞으로 이어쓰기 활동을 더 열정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자리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믹스키트님.


  앞으로 다섯 편의 이어쓰기는 어떤 주제들로,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질까? 창작자인 데킬라뮬과 믹스키트에게도 그건 미지의 영역이다. 앞으로의 다섯 주 동안 우리는 다시 한번 짧은 여정을 떠날 것이다. 누군가 각자의 호흡으로, 원하는 위치에서, 이 여정에 함께 동참해준다면 우린 더 넓은 세계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열심히 바라본다.


  •  [이어쓰기 6]은 3월 10일(수)에 업로드됩니다. 
  •  감상에 대해 혹은 데킬라뮬과 믹스키트의 활동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댓글란이나 방명록에 글을 남겨주세요! 
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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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번째 주제 : 만남  


  [거기 있(었)다], 믹스키트

 

  온갖 일이 있었다. 2015년에.

 

*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딴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쯤이었다. 나는 국어 선생님을 애정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떠나기 전 나에게 책 한 권과 편지 한 통을 주셨다.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홀로 무인도에서 지내지 않아도 돼.  내가 그랬거든. 고등학교 3학년 때 모든 게 싫어서 무인도를 만들었어.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지.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 보니 두려움이 몰려오더라고. 평생 무인도에 있게 될 것만 같았거든. 탈출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순간이 찾아올 것만 같았거든. 그러니 홀로 무인도에서 지내지 않아도 돼. 무인도를 만들지 않아도 돼.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인도에 있(었)다. 교실 맨 뒷줄, 뒷문과 가장 가까운 곳이 나의 자리였다. 나는 나만의 섬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나의 섬에 초대하지 않았다. 무인도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섬이었다. 떠난 국어 선생님을 매일 생각했다. 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친구와 u 서점에 자주 갔다. 나와 친구 둘 다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았기에, 방과 후, 해가 지기 전, u 서점이 있는 동네로 가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u 서점에 갔다. u 서점은 정말 작은 서점이었다. 나와 친구만 들어가도 꽉 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항상 조심해서 움직여야 했다. 나와 친구 모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기에 더욱 그래야 했다. u 서점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서점의 벽과 바닥, 카운터와 커다란 철제 책장, 서점 로고가 매달려 있는 가랜드와 턴테이블 모두 그랬다. 그래서 꼭 빛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빛 속에서 조심스럽게 책을 구경했다. u 서점에는 여러 장르의 책이 있었고,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새로운 작가와 세계를 탐색했다. 사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서점 사장님은 u 서점을 찾는 우리를 항상 반겨주셨다. 여름이면 크림 소다를 만들어주셨고, 겨울이면 페퍼민트 차를 끓여주셨다. 우리는 그런 서점 사장님이 좋았다. 서점 사장님은 매번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우리는 크림 소다로 더위를 식히며, 페퍼민트 차로 손을 녹이며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서점 사장님은 서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음악과 그 음악을 만든 음악가에 관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까먹게 된 사람이 등장하는 시와 그 시를 쓴 시인에 관해, 자신과 함께 사는 강아지 감자의 당돌함에 관해, 감자와 산책할 때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다. 우리는 서점 사장님의 이야기를 아꼈다. 서점 사장님과 대화를 주고받을 때면 나와 친구 그리고 서점 사장님의 세계가 합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세 개의 세계는 교류 중이었다. 아니, 세 개의 세계보다 더 많은 세계가 교류 중이었다. 서점 사장님의 이야기 속 모든 세계와 우리는 교류 중이었다. 여러 세계가 서로 뒤엉키며 점점 거대해지고 있었다. 나의 세계도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우리는 빛 속에서 있(었)다. 너무 눈부셔서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어둠을 잠시 잊고 살았다. 

 

***

 

  내가 참가한 프로젝트의 이름은 [아파트 없는 동네 걷기]였다. 이름처럼 아파트 없는 동네를 걷는 프로젝트였다. 아파트 없는 동네를 걸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하면 되는 프로젝트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고, 주택 옥상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의 걸음 습관을 기록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파트 없는 동네를 걸으며 희곡을 쓰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아파트 없는 동네를 걸었다.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걸었다. 높은 언덕에 올라 저 아래의 풍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기도 했다. 우리는 계속 걷고, 이야기하고, 웃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르고, 글을 쓰고, 기록을 했다. 걷기가 끝나면 서로의 작업을 공유하며 또 이야기를 나눴다. 도시락을 싸 와 나눠 먹기도 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가 없는 동네에서 서로 자기 자신을 선물했다. 여러 사람의 작업물을 구경하고, 나의 작업물을 보여주고, 서로의 이야기가 뒤섞이고.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이 없는 마을이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아파트 없는 동네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작업물은 너무나도 달랐다. 자신의 개성과 이야기가 그 안에 있었다. 동네를 걸으며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다른 사람의 작업물에 있었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무언가가 나의 작업물에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과 모두의 작은 마을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었)다.

 

****

 

  [아파트 없는 동네 걷기] 프로젝트에서 완성한 희곡을 공연했다. 

 

  장소 : u 서점

 

  나는 여러 사람과 내가 쓴 희곡으로 연극을 준비했다. 자주 u 서점에 같이 갔던 친구도 공연의 팀원이었다. 우리는 매일 만나 아파트 없는 동네가 배경인 희곡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인물을 구축하고, 움직이고, 대사를 뱉었다. 계속해서 연습했다. 인물에게 어울리는 의상도 구매하고, 필요한 소품도 만들었다. 여러 사람이 같이 걷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국어 선생님께 공연을 보러 와달라고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은 꼭 가겠다고 약속을 해주셨다. 나의 무인도에 선생님을 초대했다.

 

  공연 당일

  우리는 u 서점에 있었다. 흰빛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아파트가 없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표현했다. 아주 작은 u 서점에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서점 모서리에 둘러앉아 있었다. 마치 네모 울타리 같았다. 배우들은 사람으로 만들어진 울타리 안에서 연기했다.

 

  턴테이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배우들의 목소리가 울린다.

 

  국어 선생님이, 방과 후 u 서점에 함께 갔던 친구가, 서점 사장님이, [아파트 없는 동네 걷기] 프로젝트 팀원들이, 같이 연극을 만든 팀원들이, 흰빛 속에 있(었)다.

 

  내가 흰빛 속에 있(었)다.

 

  박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어느 날 잠에서 깼을 때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사라진 게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온갖 일이 사라진 상태였다.

 

  더 사라지게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붙잡지 않으면 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책상에 앉아 사라진 것에 관해 쓰는 중이다.

 

  분명히 거기 있(었)다.

  분명히 거기 있다.

  분명히 여기 있다.

  분명히 내가 있다.


  •  다음 주제는 [동네] 

  •  데킬라뮬은 [동네]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  다음주 수요일에는 데킬라뮬과 믹스키트의 [이어쓰기] 작업 노트가 업로드됩니다. 

  •  [이어쓰기 6]은 3월 10일(수)에 업로드됩니다. 

 

Posted by 믹스키트
:

 

  •  네 번째 주제 : 포옹 


  [세상의 모든 롱디들에게], 데킬라뮬 

 

  오십 센티미터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3초 이상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면, 각자의 심장이 서로를 향해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리가 0으로 좁혀지는 포옹의 순간엔 우리의 심장과 심장이 얼마나 강력히 반응할까. 그리고 그 순간을 오백 시간 넘게 공유한 우리의 심장은, 서로를 얼마나 오래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프라하 캄파 섬에서였다. 푸른 강을 뒤로 하고 서로를 꼭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을 본 건. 여름날의 눈부신 풍경보다 그 장면이 기억에 더 선명히 새겨진 이유는,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슬픈 감정 때문이었다. 그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서로의 어깨에 파묻은 얼굴에서, 옷가지를 꼭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에서, 간간히 들썩거리는 어깨에서. 어쩌면 긴 이별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였나 보다. 너를 뒤로하고 공항 게이트를 통과해야 했던 순간에 그 두 사람이 떠올랐던 것이. 게이트는 고맙게도 닫히지 않았고 그 열린 문 사이로 네가 보일 때마다 너는 나를 발견하고 계속 손을 흔들었다. 그게 반가웠지만 내심 네가 인사를 그만두고 돌아가길 바랐다. 네가 먼저 나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탄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기심 때문에.

 탑승 시간이 촉박하게 남아있었고, 서둘러 보안 검사를 마치려고 허둥대는 나에게 직원이 주의를 주려는 듯 뭐라고 얘기했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너를 생각하지 않고 울지 않으려는 데 나의 온 신경이 가 있었기 때문에.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요란한 작별 인사는 이미 겪었으니까, 그걸 다시 한번 혼자서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작별은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부터 내가 언제 떠나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때까지 남은 시간이 마냥 길게만 느껴지다가도 우리가 종종 바보 같은 농담을 나누고 깔깔거릴 때, 네가 신이 나서 엉뚱한 춤을 출 때, 잠들기 전 침대에서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책을 읽거나, 인기 있는 시리즈를 볼 때, 이 시간이 언젠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단되어 버린다는 사실이 가끔 참을 수 없이 무섭게 다가왔다. 그 길 잃은 감정은 부지런히도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고 내 힘으론 그걸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너의 품은 언제나 그 감정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있던 그 날에도.

 

 

  너와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자다 눈을 떴을 때, 이미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고, 너는 여전히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가끔, 우리 중 누군가는 누군가를 남겨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게, 우리의 도시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불완전함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만남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늘 위태롭게 서 있다는 게, 원망스러워진다. 작별의 순간을 감각 해야 하는 이런 순간에는 더더욱.

  미움은 다시 슬픔이 되어 흘렀고, 나의 훌쩍임을 들은 너는 잠에서 깨었다. 무슨 일이냐고,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묻는 너의 물음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너를 그냥 바라보는 거였는데, 질문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을 보았을 때 너 역시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한참 눈과 눈을 맞추고 있다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끌어안았다. 숨이 더워지도록 깊숙이 파고든 너의 체온 덕에 울음도 미움도 그칠 수 있었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거야, 우린 다시 만날거야, 같은 너의 약속의 마무리는 언제나 따뜻한 포옹이었고, 그 맺음은 말보다 더 확실한 안정을 주었다. 그런 밤과 낮 때문인 것 같다.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공항에서, 금세 눈물을 닦고 씩씩해질 수 있었던 건.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는 것, 한때는 두렵게 다가왔던 그 사실이 이제는 오히려 안정을 준다는 것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이 그대로 그쳐버린 게 아니니까,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그 시간의 연장선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다시 비행기에 오를 테니까.

 

 

  그때까진 우리의 심장이 계속해서 서로를 기억하고 그리워해주기를. 


  •  다음 주제는 [만남] 

  •  믹스키트는 [만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Posted by 데킬라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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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번째 주제 : 해 질 녘  


  [해 질 녘, 에서], 믹스키트

 

 

  해 질 녘에서

 

 

  해가 지고 있다. 서늘한 공기가 불어온다. 외투를 가져오지 않아 속상하다. 두 손으로 두 팔뚝을 문지른다. 내가 나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의 왼쪽 하늘은 자줏빛으로 물들고, 오른쪽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든다. 구름의 색도 하늘의 색으로 물든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겁이 난다. 주위를 유심히 둘러본다. 왼쪽 하늘과 오른쪽 하늘의 색이 점점 섞이기 시작한다. 아, 하고 탄식을 내뱉는다.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천천히 어두워진다. 여기를 비추는 태양이 점점 몸을 숨긴다. 잃어버린 순간들이 나타난다. 떠나간 친구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고개를 다리 사이로 파묻는다. 눈물이 터지려고 한다.

 

 

  공터에서 

 

 

  텅 비어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다. 두 손에는 여러 식자재와 간식으로 꽉 찬 분홍색 종량제 봉투가 들려있다. 손가락이 저려온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뻥 뚫린 공터를 발견하게 되어 그러지 않기로 한다. 집 근처에 이렇게 큰 공터가 있었다니.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게 되어 들뜬다. 잠시 머물렀다 가기로 한다. 

  공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만 바닥에 깔려있다. 주차장인가? 잠시 생각하지만, 바닥에 주차 라인이 그려져 있지 않아 금방 아니라고 단정한다. 공터 중앙으로 향해 들고 있는 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곧 저녁이 올 것이다. 난 조금 걷고 싶어져 넓은 공터를 규칙 없이 걷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와 발소리만 공터에 있다. 터벅터벅 걷다 장을 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내가 대견해진다. 며칠 만에 바깥에 나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꽤 오랜 기간이었다. 어느새 머리도 많이 자라 바람에 휘날릴 정도다. 내가 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는지 신중하게 떠올려본다. 무엇 때문이었지? 분명 어떤 일이 나에게 벌어진 게 확실한데, 그 일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용기를 내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과 마트에서 먹고 싶은 것을 샀다는 사실과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 공터를 발견하고, 산책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해진다. 의욕이 다시 생겨난 것 같아 기뻐진다.

  꼬르륵 소리가 배에서 들려온다. 산책을 멈추고 공터 중앙으로 향해 종량제 봉투를 뒤적거린다. 조금 전 산 초코바를 꺼내 들고 그 자리에 앉아 까먹기 시작한다. 달콤한 초콜릿의 맛과 고소한 견과류의 맛이 뒤섞인다. 저녁에 어떤 요리를 해 먹을지 고민한다. 카레라이스나 오무라이스를 해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바닷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어. 여기 바람은 네가 있는 곳보다 더 차가워. (아마 그럴 거야. 너와 함께 이때쯤, 해가 질 때쯤, 지금과 비슷한 계절쯤, 네가 사는 동네를 산책한 적 있었잖아. 그 공기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거든. 그땐 너와 같이 있어서 포근했던 걸까? 잘 모르겠어) 뺨은 시리지만 바닷내음을 맡으며 자전거 타기를 멈출 수는 없어. 넌 내가 이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 너와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거였으니까. 넌 나에게 이사 가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지. 잘못한 게 없으면서 다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난 바다가 있는 동네에서 살고 싶었어. 바다를 내 곁에 두고 싶었거든. 바다를 보면 마음이 뻥 뚫리잖아. 앞에 놓일 모든 순간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잖아. 이사를 오기 전 난 많이 두려운 상태였어. 내가 전부 포기해버릴 것만 같아서. 내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아서. 아무런 이유 없이 눈물이 날 때가 많았거든. 거리를 걷다가, 쌀을 씻다가, 샤워를 하다가, 눈을 감고 노래를 듣다가, 화분에 물을 주다가, 청소를 하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어. 언제는 버스를 탈 때 눈물이 나기 시작해서 내리고 나서까지 멈추지 않은 적도 있었어. 내가 왜 이렇지? 왜 이렇게 눈물이 계속 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어. 너무 답답했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없었어. 뭘하든 계속 눈물이 나니까. 혼자 있을 때에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밖에선 더 어려웠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거든. 계속 울고 있으니까.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울어버리는 건 나에게도 버거운 일이었어.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내가, 나 자신 하나 다룰 수 없는 내가 너무 답답했어. 떠나야 했어. 바다 옆으로 가야만 했어. 너에게 나의 이런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았거든. 네 앞에서 갑자기 울고 싶지 않았거든.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넌 이렇게 말하겠지. 내 앞에서는 울어도 돼. 내가 밖에서 꼭 같이 있을게. 널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칠게. 언제나 넌 내 편이 되어주었으니까. 너보다 바다가 좋아 여기로 온 게 아니야. 날 다시 조립하기 위해 바다로 온 거야. 차근차근 날 조립해 다시 울고 싶은 날에만 울음을 터트리는 내가 되어서 돌아갈게.

  바다가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어. 자전거를 타며 그 변화를 바라보고 있어. 바람이 눈을 찔러서인지, 네가 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또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난 해 질 녘 바닷가에 있어. 너와는 조금 다른 바람을 맞으며 함께 있어.

 

 

방안에서

 

 

  귤껍질을 까고 있습니다. 창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방안이 온통 귤색입니다. 해 질 녘의 향기는 지금 이 방을 꽉 채운 귤의 향과 비슷할까요?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하루의 끝은 해가 질 때쯤일까, 해가 지고 깜깜해졌을 때쯤일까, 자정이 될 때쯤일까? 전 그때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자신에게 하루의 끝은 해가 질 때쯤이라고 했습니다. 긴 시간 방안에서 머물다 오랫만에 방 밖으로 나갔을 때 그걸 깨닫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친구는 그날 아주 오랜 칩거 생활을 끝내고 장을 보러 나갔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나가고 싶어졌다고 하더군요. 마트에 도착했을 때 조금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마트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구는 용기를 가지고 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먹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쓸어 담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많은 종류와 양이었다고 했습니다. 두 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요. 친구는 그걸 들고 집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공터를 발견했습니다. 텅 빈 공터를요. 그때 해가 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는 하늘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오늘도 살아 내버렸네.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는 공터에서 초코바를 먹었는데 너무나 달콤하고 고소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집에 왔을 때 그 초코바를 두 손 가득 사 왔고요. 전 친구의 말을 들으며 초코바를 먹었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방안이 귤색으로 꽉 차고 있었습니다.

  다 깐 귤을 작은 덩어리로 잘라 한 입 먹어봅니다. 입안이 온통 귤색으로 변합니다. 곧 지나갈 겨울과 멀리 떠난 친구를 떠올립니다. 아, 오늘은 친구에게서 편지가 온 날입니다.

 

 

해 질 녘, 에서

 

 

  색이 변하는 하늘 앞에서 인사를 합니다.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합니다. 인사를 받은 사람은 또 어디의 해 질 녘, 에서 저에게 답인사를 보냅니다. 손을 크게 흔들고 안녕, 크게 외쳐봅니다. 안녕, 하루의 끝에서 이렇게 인사를 보내. 안녕, 거기는 안녕하니, 안녕, 너는 안녕하니, 안녕, 당신은 안녕합니까, 안녕,

 

  해가 지고 있습니다. 서늘한 공기가 불어옵니다. 외투를 가져오지 않아 속상합니다. 두 팔로 어딘가에 있는 당신을 껴안습니다. 나와 당신이 해 질 녘, 에서 포옹하고 있습니다. 

 


  •  다음 주제 : 포옹 

  •  데킬라뮬은 [포옹]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Posted by 믹스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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