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쓰기 8] 한여름 밤의 꿈
스파이시 만다린/첫 번째 [이어쓰기] (끝) 2021. 3. 24. 01:14 |
- 여덟 번째 주제 : 꿈
[한여름 밤의 꿈], 데킬라뮬
*
왜 너였을까.
그래, 너의 달리는 모습이 멋져 보이긴 했지만. 숨을 몰아쉬다 그 커다란 물병을 통째로 입에 가져다 대고 마시던 그 모습에, 물을 삼키는 목의 떨림에 시선을 도저히 돌릴 수 없긴 했지만. 너 때문이라고 생각해. 물병을 벤치 위에 놔둬 달라고 부탁한 건 너잖아. 나는 가만히 서 있던 죄밖에 없는걸. 아니,
나도 마셔도 돼?
어.
내가 입 대고 마시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 편하게 마셔, 입 대도 돼, 라고 했던 것도 너잖아. 그 때문인 거야. 너와 내가 얽혀 있는 채로 꿈속에 나타난 건.
너의 무거운 체온이 나를 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내가 아직 철 지난겨울 이불을 덮고 배 위에는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어. 어쩐지 서늘한 손길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 뒷목과 어깨를 한 번 쓸어보기도 하고. 느껴지는 건 그저 땀에 젖은 내 피부와 들러붙어 있는 머리칼들이었어. 내 침대가 이렇게 크게 느껴진 건 처음이야.
허전한 게 당연하지, 눈 뜨기 전만 해도 네가 여기 나와 함께 누워 있었으니까. 아니, 심지어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었던 게 아니고,
알람이 울린다. 교복이 다 말랐으려나.
*
교실 뒷문을 열자마자 네가 보여. 너는 평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나와는 일 년에 말을 한 두 번 섞어볼까 말까 한 친구들. 그러니 그 가운데 대장처럼 앉아있는 너는, 내겐 너무 먼 사람이지. 평소엔 너무나 잘, 거의 자동으로 접히던 마음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꿋꿋하게 서 있어. 쿵쿵거리면서. 구겨지지 않을 거라고 선언이라도 하듯이. 오늘은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어. 너의 체온이 꿈속에서 느꼈던 것만큼 따뜻한지, 알아보고 싶어. 그런 허튼 생각이 자꾸 가능할 것만 같아.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 그 소리가 너의 의자에서 난다는 걸 나는 바로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너의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네. 설마, 정말로?
네 모습이 내 눈앞에 있길 바라면서 시선을 올렸을 때, 너는 휑, 내 뒤를 지나 교실 뒷문을 열어. 야, 한지, 또 똥 싸러 가냐? 네 무리 중 한 명이 깔깔거리며 외치고, 너는 교실 안으로 머리만 쏙 빼고, 아 생리 중이라고! 하고 받아친다. 갑자기 나도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는 것 같아. 손이라도 씻고 싶어 지는데, 하면서 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그만, 이건 너무 비참한 것 같아 도로 주저앉았어. 오늘은 그냥 책상 앞에만 딱 붙어 있어야지.
*
그 꿈을 꾸어서 좋은 게 딱 한 가지 있어. 수업이 너무 지루해지면 그 장면을 반복 재생하면 되거든. 시간이 아주 쏜살같이 지나가더라. 창밖의 구름처럼 내 머리도 교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 오후 수업 시간에는 거기에 다른 장면들을 더 추가하기 시작했어. 5교시엔 네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는 것에서 시작했다가, 6교시엔 내 고백을 네가 받아주는 것에서 시작하고, 7교시에는 무얼 또, 세영아!
어? 아직 쉬는 시간인데, 네가 왜 내 눈앞에 있을까.
나 법정* 모르는 것 좀 알려주라.
그제야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네가 들고 있는 교과서와 문제집을 발견해. 교과서도 문제집도 밑줄이고 동그라미고 모두 연필로 그어져 있어. 너는 필기를 이렇게 하는구나.
너는 교과서와 문제집을 비교해가며 질문을 하고, 나는 최대한 자세히, 그리고 천천히 답을 하려고 해. 그건 너의 이해를 위해서라기 보단, 알지?
너는 설명을 듣기 위해 내 옆자리에 앉고, 몸을 가까이 내 쪽으로 기울이고 있어. 내 얼굴과 가까운 쪽으로. 닿지 않았는데도, 네가 지닌 온기가 느껴져. 너는 숨소리가 느리고 조용하네. 감각에 온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해. 내가 네 물음에 제대로, 잘 답변을 해줘야 네가 다시 나에게 물어볼 테니까.
또 물어볼 것 없어?
응, 이게 다야. 고마워.
물어볼 것 있음 또 와.
너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는 네가 다시 안 올 수 있다는 걸 알아. 네가 나에게 뭔가를 물어본 적도 이번이 거의 처음인걸. 그러니 너에게 내가 간밤에 이런 꿈을 꿨다고 얘기하는 기회도 없겠지. 영영.
7교시에는 아무 상상도 하지 못했어.
*
다시 너야.
네가 우리 집 베란다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네. 나도 반갑게 답을 해. 어서 들어와. 거기 왜 그러고 서 있니.
장면이 바뀌어. 나는 땅 위에 있어. 아주 낮은 곳에. 나를 내려다보는 반 친구들이 보여. 그중엔 너도 있고, 너의 무리 친구들이 있고, 나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어. 나를 비웃고 있어.
너희들이 나에게 던지고 있는 것은 노란 해바라기야. 활짝 핀 해바라기가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던져져.
그만해, 제발. 눈을 꼭 감았는데 너희들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아. 눈을 떠도 네가 보이고 감아도 보여.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네. 땅을 짚어야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간힘을 쓰다가,
눈을 떴어.
내 방 천장이 보여. 다시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고. 나는 왜 아직 여름 이불을 꺼내지 않았을까. 해가 뜨면 당장 이불을 세탁기에 넣어 두고 여름 이불을 꺼내야겠어. 우선 지금 당장은 이불을 그러모아 품 안에 안아. 천천히 숨을 쉬자. 너의 숨소리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들이쉬고 내쉬어.
*
서진여자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뜻깊고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교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은 소란스러워져. 곧 담임 선생님이 몇 가지 전달사항을 얘기하고 나면 한 달이 넘게 이 교실은 비어 있겠지. 한 달이 넘게, 나는 너를 볼 수 없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만큼은 너를 더 자주 힐긋거리기로 했어. 네가 날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뭐 어때. 너는 오늘 학교가 파하고 친구들과 놀러 가는 동안 나를 까맣게 잊을 텐데.
선생님은 오늘따라 말을 짧게 끝내고, 반 친구들은 신이 나서 교실 문으로 달려 나가. 너는 설렁설렁 그 뒤를 따라가고. 너의 시선이 나를 짧게 지나치고, 방학 잘 보내, 세영아, 너는 그렇게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지. 나는 겨우 너도,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아직도 네가 꿈에 나왔으면 좋겠어.
* 법정: 법과 정치 과목의 줄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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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믹스키트는 [처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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