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작업 노트] 이어서 계속 

 

  첫 번째 스파이시 만다린 프로젝트 [이어쓰기]가 막을 내렸다.

 

  처음 [이어쓰기]를 시작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우리는 두려웠다. 매주 예상할 수 없는 주제를 기다려야 했고, 그것을 가지고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매주 자신의 일상에 끼어드는 어떠한 세상과 마주하는 일은 우리를 막막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이어쓰기]는 우리에게 도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10주간 번갈아 가며 글을 썼다.

  다음 타자를 위한 주제를 자신의 글 속에서 열심히 찾았다.

  그것을 꼼꼼하게 포장해 소중히 선물했다.

  각자 선물 받은 주제로 작지만, 힘이 센 세상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총 10개의 세상이 탄생했다. 

 

  우리는

  서로의 주제를 아꼈다. 

  서로의 시간을 아꼈다.

  서로의 공간을 아꼈다.

  서로의 사람을 아꼈다.

  서로의 마음을 아꼈다.

  서로의 세상을 아꼈다. 

  서로가 서로를 아꼈다. 

 

  그랬기에

  그 여러 개의 세상은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모두 연결되어있었다.

 

  이제 연결된 우리는 [이어쓰기]가 두렵지 않다. 일상의 불확실과 마주하는 건 여전히 무섭지만, 그럼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어쓰기]가 끝나도 우리는 이어서 계속 쓸 것이다. 새로운 세상과 만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신이 선물한 주제를 가지고 [이어쓰기]의 소감을 작성해보기로 했다. 

 


  • 이어쓰기 리스트 [괄호 안은 주제]
  1.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 믹스키트 [스파이시 만다린]
  2. 도망치는 골목에서, 데킬라뮬 [도망자]
  3. 해 질 녘, 에서, 믹스키트 [해 질 녘]
  4. 세상의 모든 롱디들에게, 데킬라뮬 [포옹]
  5. 거기 있(었)다, 믹스키트 [만남]
  6. 동네친구, 데킬라뮬 [동네]
  7. 꿈속 골목길 꿈속, 믹스키트 [골목길]
  8. 한여름 밤의 꿈, 데킬라뮬 [꿈]
  9. 몇 개의 나, 믹스키트 [처음]
  10. 소우주, 데킬라뮬 [반복]

 

  데킬라뮬은 [스파이시 만다린] / [해 질 녘] / [만남] / [골목길] / [처음] 으로,

  믹스키트는 [도망자] / [포옹] / [동네] / [꿈] / [반복] 으로.

 


 

*

 

데킬라뮬

[스파이시 만다린] / [해 질 녘] / [만남] / [골목길] / [처음]

 

 

1.

  우리 같이 뭔가를 해 보는 거야,

  몇 해를 그렇게 기약 없이 보내다 [처음]으로 블로그 기획을 제안받았을 때,

  마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계속 해 볼 수 있다는 것보다도, 그걸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더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좋은 동료와, 독자들과 함께. 혼자였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못했을 것 같다. 책임이 따르는 일임에도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았다.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어 마음을 둥실둥실 떠다니게 만들었다.

 

 2.

  작년 한 해 나는 낯선 [골목길]에 서 있었다.

  그 골목길을 통과하고 마주할 세상은 이전과는 분명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세상을 빨리 마주하고 싶은 설렘과 함께, 그 현실을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잠 못 드는 밤들을 통과하고, 불안한 낮을 지나 골목의 끝을 지날 때, 블로그를 위한 첫 글을 썼다.

  쓰고, 읽고, 생각하고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몇 주가 흐르고, 몇 달이 흘렀다.  새로운 리듬에 맞춰 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3.

  나는 많은 경우에 [해 질 녘]의 시간을 싫어한다. 나의 하루가 얼마 안 남았다는 재촉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오늘 하루를 얼마나 잘 보냈는지 다그쳐 묻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종 어둑해지는 시간까지 글에 대한 아무런 실마리도 얻지 못할 때가 있었다. 가장 피하고 싶은 [만남]. 도망은 있을 수 없는 선택지였고,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이 주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그 감각을 온전하게 견뎌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쌓여서 완성된 글들은 어설프고, 부끄럽고, 종종은 숨기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었던 건 언제나 그 세상을 기꺼이 들여다봐주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 무언가를 발견해주고, 이해해주고, 괜찮다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

 

 4.

  그렇게 완성된 우리의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

 

 

*

 

믹스키트

[도망자] / [포옹] / [동네] / [꿈] / [반복]

 

 

  나의 삶이 몇 번이든 [반복]되길 바라는 순간이 많다. 나는 매일 생각한다. 몇 번의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언제든 우울한 나를 버리고, 우울하지 않은 새로운 나로 몇 번이든 살아갈 것이라고. 왜냐하면 매일 아침 일어나면 내 눈앞에 죽음이 있고, 죽음과 싸움을 준비하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괴로웠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가끔 이 지구가 폭발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마치 [도망자]가 된 것만 같았다. 매일 우울이라는 상대에게서 도망치는 도망자. 하지만 완전히 도망쳐 사라지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언제나 나를 가로막는 막다른 길이 있었고, 그 앞에서 주저앉기 일쑤였다. 거기에는 우울이 있었고, 우울은 나를 다른 방향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워주길 바랐다. 함께 도망가주길 바랐다.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생각과 마음을 [이어쓰기]에 담았다. [이어쓰기]가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창구였던 것이다. 나는 나를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인물을 [이어쓰기] 속에 만들어냈고, 매주 그 인물과 함께 도망쳤다. 우울을 피해 새로운 길을 찾았고, 절대로 우리를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었다. 그 인물과 함께 있을 때면 종종 괜찮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새로운 내가 되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삶이었다.

 

  꼭 내가 만들어낸 인물만 그러한 역할을 했던 건 아니었다. 데킬라뮬의 세상 속 인물들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해주었다. 그들은 나의 세상과 연결된, 새롭게 탄생한 세상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아침마다 나를 지켜주었다. 내가 무기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바깥으로 이끌어 [동네]를 걷게 해주었다. 나는 그들과 아침마다 산책하며 선물 받은 주제에 관해, 그것을 선물한 데킬라뮬의 마음에 관해 생각했다. '데킬라뮬은 왜 이 주제를 선물했을까? 데킬라뮬의 세상 속 이 주제는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내가 선물한 주제는 데킬라뮬의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런 생각들이 마구 들었고, 동시에 조금 더 살아야겠다는 의욕도 생겨났다. 의욕을 가질 때마다 데킬라뮬의 세상 속 인물들은 나를 칭찬해주었다. 나는 매주 수요일, 그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도 도망자가 아닌 산책자의 위치가 되어 열심히 걸었다. 산책은, [이어쓰기]는, 데킬라뮬과 데킬라뮬의 세상은, 나를, 나의 세상을 지켰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우울하고, 아침이 오지 않길 기도하며 잠에 들고, 매일 내가 죽는 [꿈]을 꾼다. 꿈이 현실이 되길 바라기도 한다. 이 상태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어쓰기]를 하며 조금 변한 게 있다면, 내가 조금은 더 살아낼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을 뜨면 혼자가 아닐 것이고, 눈을 감기 전에도 혼자가 아닐 것이다. 나의 세상 속 인물이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이고, 데킬라뮬의 세상 속 인물도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항상 내 옆에 있을 거라는 생각, 함께 도망가줄 거라는 확신, 도망자의 자리에서 결국 벗어나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나를 살게 했다. 

 

  매주 [이어쓰기]를 하며 행복했다. 나의 글과 데킬라뮬의 글을 읽으며 많이 울기도 했다. 우리의 연결,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어 기뻤다. 데킬라뮬이 없었다면, 나를, 나의 세상을 언제나 [포옹]으로 맞이해주던 데킬라뮬과 데킬라뮬의 세상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나는 변함없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울과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내가, 그 싸움을 위해 글을 쓰는 내가, 나의 세상과 데킬라뮬의 세상과 손을 꼭 잡는 내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의 [이어쓰기]는 계속될 것이다. 죽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이어서 계속, 될 것이다.

 


 

우리의 [이어쓰기]는 계속 될 것이다.

이어서 계속,

 


  •  지금까지 첫 번째 스파이시 만다린 프로젝트 [이어쓰기]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두 번째 스파이시 만다린 프로젝트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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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 번째 주제 : 반복 

 [소우주], 데킬라뮬

 

*

 

  이번엔 어디지?

 

  눈을 뜰 때마다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주위의 간판을 확인하는 것. 이번에 보이는 것은 한자이다. 간체자가 아닌, 복잡하게 쓰인 번체자. 피부에 달라붙는 습한 공기.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면서 내가 있는 곳이 또렷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대만, 타이난. 몸을 일으켜 주변에 잡히는 종이를 아무거나 들어 읽어본다. 미생물학. 처음 등장한 분야지만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떻게든 이 생에서의 삶은 흘러가게 되겠지.

 

  나는 우선 씻기로 한다.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땀에 젖은 너저분한 옷차림으로 너를 보고 싶지는 않다.  이번에는 네가 나를 바로 찾아와주었음 했다. 바로 지난 번 이별이 너무 힘들었으므로. 네가 다시 예의 그 툴툴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주길 바랐다.

  가끔은 내가 너를 찾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 보통 깨어나고 곧바로, 혹은 며칠 내로 네가 나를 방문하곤 했다. 그만큼 우리는 자주 만나는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어떤 세계에선 한 달 이상 보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매일같이 너에게 전화를 걸고, 너의 집 앞을 어슬렁거려보고, 네 주변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 보는 것 뿐이었다. 그런 시기에 너는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너의 집을 무작정 침입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네가 현관문 밖에 서 있다. 나는 너를 보자마자 끌어안지 않으려고, 너무 반가워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해야 한다. 너에게 나는 바로 어제도 보았을 사이니까. 그래도 내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환해지는 걸 숨길 순 없었는지, 너는 인상을 찌푸리며 왜 그렇게 부담스럽게 구냐고 묻는다.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그냥, 너를 봤으니까. 너는 어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집으로 들어선다. 

 

*

 

  매번 겪는 일인데도 신기하다. 낯선 이름과 낯선 언어를 쓰고 있는데도 너는 언제나 내가 알던 너이다. 특히 그 웃음소리.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지난 번은 너무 짧았다. 내가 깨어나고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너는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그건 그냥 사고였다는 것. 네가 우발한 것이 아닌, 그저 사고. 

  무슨 일 있어?

  너의 물음에 상념에서 빠져나온다. 지금 네가 내 눈 앞에 있고, 어차피 지나가버린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 다시 앞으로 닥쳐올 일을 생각하게 되고, 지금같은 상황에서 그것만큼 최악인 것은 없다.

  야시장에 가기로 한다. 이곳에선 네가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궁금하다.

 

*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너와 나는 같은 대학 연구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사이였다. 업무로 만난 사이지만 깊은 얘기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우린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모두가 퇴근하고 난 뒤에도 우린 종종 더 늦게까지 남아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허기를 채우면서 술을 한 잔 하곤 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너는 홀로 집 거실에 앉아 있을 때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이 차라리 고독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두렵고 비참하고 한심한 감정을 느끼진 않았을 것 같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라곤, 그 외로움이 널 죽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뿐이었다. 우리 둘 다 외로운 사람들이니까, 서로를 위해 있어주면 조금 덜 외롭지 않겠냐고. 그래줄거냐고 묻는 너의 목소리에는 언뜻 의심 혹은 불안이 깔려 있었다. 터무니없이 당연한 소리였다. 너의 곁에 남아 있기 위해 내가 몇 번의 생애를 반복하고 있는지 네가 안다면,

 

  알 리가 없지만.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첫 번째 세계에서의 너는 네가 죽고 싶다고 얘기했던 그 나이를 몇 해 더 넘겼다. 그 해의 생일에 너는 너무 오래 살았다고 말했고, 나는 적어도 십 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네가 십 년은 너무 길다고 했고, 그럼 나는 오 년을 얘기했고, 너는 알았다고 했지만 약속이 지켜지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너는 나에게 약속한 적이 없긴 했지만.

 

*

 

  왔어? 

  네가 좁은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딱 한 사람만 누워 있을 수 있는 정도의 침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방문할 때마다 너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힘든지 거의 항상 누워만 있다. 네가 좋아하는 알갱이가 둥둥 떠다니는 음료를 협탁 위에 올려두고 네 침대 곁에 앉는다. 

  좀 어때?

  질문이 뭐가 필요하냐는 듯 너는 코웃음을 친다.

  재밌는 얘기 좀 해봐.

  가만히 말을 고르고 있는 나에게 네가 먼저 입을 연다. 네가 그렇게 요청할 때마다 나는 한 번도 너를 만족시킬만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 적이 없는데, 너는 습관처럼 그 말을 하곤 한다. 지금처럼.

  너 평행 우주라는 거 믿어?

  너는 과학하는 애가 너무 비과학적인 걸 믿는 거 아니야?

  그런가, 너무 사이비같나. 그래도 우주는 우리가 절대 알 수 없잖아. 우주란 거, 차원이란 거. 어딘가에는 다른 너와 내가 또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의 너는 지금처럼 아프지도 않고 그냥 행복하기만 할 수도 있지.

  그럼 뭐해. 지금 나는 여기 있는데.

  맞아. 그렇지.

  뭐야 재미없게.

 

  조금 있다 너는 잠이 들었다. 나는 한참 네 곁을 지키고 있다가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너는 그렇게 한 달을 더 병실에 있었다.

 

*

 

  자동차 경적 소리. 멀리서 들리는 구급차 소리. 어른거리는 햇볕 때문에 눈을 뜬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번 선거 결과에서는...

  대한민국, 서울. 

 

  이번에도 일본은 아니구나. 나는 그게 재밌다고 생각한다. 너는 언제나 그곳을 좋아했지만 네가 계속해서 태어나는 곳은 자꾸만 그 섬이 아닌 다른 곳이다. 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인가보다 생각한다. 그 바다에서,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해달라던 너의 부탁. 노래를 부르든 자전거를 타든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걸 할 수 없었다.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되면, 나의 존재도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언제나. 

 

  제일 먼저 핸드폰을 찾아 너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다.

  야야야야야야 언제 와

  약속 시간이 십 분 지나 있었다. 서둘러야겠다.

 

  새롭게 깨어날 때마다 늘 네가 이 세계에선 너무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번에는 너와 함께 오래 오래 늙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번 세계에서는, 그럴 수 있을까? 내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올까?

 

  멀리 골목에 서 있는 네가 보인다.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  다음 주 수요일(4월 14일)에는 데킬라뮬과 믹스키트의 [이어쓰기] 마지막 작업 노트가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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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홉 번째 주제 : 처음 

  [몇 개의 나], 믹스키트

 

 

연과 우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지금이 첫 번째가 아닌 거지." 연이 말했다.

  하지만 우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연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카페가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는데, 우에게는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우는 온 신경을 연의 두 입술에 집중한 채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추측하려고 했다. 쉽게 되지 않았다.

  "뭐라고?" 우가 답답한 마음을 뱉어냈다.

  "안 들려? 내가 하는 말이 안 들리냐고." 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빠르게 요동치는 연의 두 입술. 우는 연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울어버릴 것만 같다는 불가해한 확신이 우를 감쌌다. 우는 카페의 문을 가리키며 밖으로 나가자고 소리쳤다. 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

  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야.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넌 나를 생각하고 있니?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니? 알 수가 없네.

 

  오늘은 너의 생일이야. 넌 너의 생일에 항상 이렇게 말했지.

  만약 내가 죽는 날을 택할 수 있다면, 난 내 생일을 택할래. 

  정말로 넌 네가 한 말을 지켜냈구나. 말을 지켜낸다는 거 어려운 일인데. 넌 그 어려운 일을 해냈구나. 난 너의 말이 이렇게 빨리 지켜질 줄은 몰랐어.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래서 계속 주저앉게 돼. 너의 장례식에서, (네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널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계속 주저앉아 울게 돼. 그래서 잠시 어디론가 가고 싶었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너의 죽음을 진짜라고, 사실이라고, 굳게 믿게 될 것 같았거든. 내 집 곳곳에 네가 있으니까. 항상 있으니까.

 

  그래서 난 지금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대는 언덕에 있어. 내 뒤에는 높은 산이 있고, 내 아래에는 수많은 집들과 바다가 있어. 뻥 뚫린 곳에 있으니 기분이 좋아. 한 발만 내디디면 꼭 날 수 있을 것만 같아. 내 등 뒤에 날개가 솟을 것만 같고, 그 날개를 가지고 내가 막 바다 위를, 수많은 사람들 머리 위를, 나무가 만개한 숲과 산, 동산 위를 날아다니고 있을 것만 같아. 

 

  오늘 널 생각하며 꽤 오래 배회하니 생각보다 내가 집 밖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넌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 자주 날 집 밖으로 끄집어냈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면서 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내가 까먹고 있었던 것 같아. 집 안에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누군가와 마주하는 게 지겨워서, 두려워서, 무서워서. 홀로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일기를 쓰고, 드라마를 보고, 향을 피우고. 그런 것들을 하다 보면 바깥의 일 같은 건 잊을 수 있으니까, 삭제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난 집 안을 좋아했던 것 같아. 하지만 뻥 뚫린 곳에서 나에게 안녕하냐고 물었더니 안녕하다고 하더라. 생각보다 난 지금 안녕하고, 바깥을 애정하고, 인간을 그래도 애정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 너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어. 넌 항상 나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산책에 관해, 나무에 관해, 구름과 빛, 그 구름들의 그림자에 관해, 무지개에 관해, 비와 비 온 뒤의 풍경에 관해, 언덕 위의 공기에 관해, 언덕 위에 도달했을 때의 순간에 관해, 강가의 냄새에 관해, 강가의 물고기들에 관해, 숲과 숲의 소리에 관해, 나뭇잎의 마음에 관해 보여주고 들려주곤 했으니까. 그것도 자주, 나를 위해 해주었으니까. 바깥을 두려워하지 않게 도와주었으니까. 내가 집 안에 있어도 바깥을 미워하지 않게 된 건 다 네가 준 희망과 용기 때문이야. 바깥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어떠한 소리 냄새가 있다는 걸 계속 말해주었으니까, 상기시켜주었으니까, 내가 안녕할 수 있는 거야.

  요즘 종종 너와 강릉에 갔을 때를 떠올렸어. 그때의 기억은 언젠가 한 번씩 꼭 찾아오곤 하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요즘 계속해서 강릉 바다의 소리, 모래의 촉감, 어두운 바다 앞에서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계속 들리고 보이고 만져졌어. 내가 꼭 그때의 내가 된 것만 같았지. 거기에 다시 도달한 것만 같았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그때로? 언제나 내가 그 순간에만 있으면 좋겠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어쩌면 우리 둘만 있었던 바다 앞에서 영원히 있으면 좋겠어. 너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다시 강릉에 가자고. 우리 둘의 시간으로, 그 영원처럼 느껴지던 순간으로 다시 가자고.

  네가 없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 며칠 전에 넌 나에게 사랑한다고 했지. 그리고 내가 너에게 큰 무언가라고 했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낼 수 있었던 건, 내가 나중까지 살아낼 수 있는 건 네가 있었기, 있기 때문일 거야. 네가 없었다면, 네가 없다면, 난 어떠한 언덕에 가도 새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을, 무섭고 차가운 바다에 평생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바깥에서 오랫동안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 

 

  넌 나에게 있어. 사라진 게 아니라, 여기에, 어쩌면 우리의 시간 안에 있다고 생각해.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올해도 너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 다행이야.

 

 

 

 

  우에게 보내는 편지

 

  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니. 내 몸 어딘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된 불이 날 태우고 새까만, 형체를 잃은 재로 만들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소리를 들을 적 있니. 나는 종종 그 소리를 들어. 내가 불타도록 있는 힘껏 몸짓을 보이는 불꽃의 음성을. 그럴 때면 다행이다, 라는 마음과 끔찍하다, 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어. 정말 무언가도 아닌 재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게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바라기도 해.

  언젠가부터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내 우울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어. 잠깐 그 마음은 몸을 숨기고 나를 속이고 있었어. 마치 놀리는 것만 같이, 하염없이. 나에 대한 조롱, 기만과 같은 것들, 우리의 세계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날 괴롭혔어. 불꽃이 되어서, 나를 태우려고 몸을 이리저리 굴렸지.

  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타닥타닥 소멸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조금은 웃기기도 해. 그래, 태워보아라, 어디까지 타들어 가는지 지켜보겠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 그들은 내가 하는 생각들을 듣기나 할까. 만약 듣는다면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나와 그들의 언어는 다를 텐데. 막을 수는 없겠지. 막을 용기도 의지도 타들어 가니까.

  난 그들의 온도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어. 파란 쪽이 더 뜨거운지 붉은 쪽이 더 뜨거운지도 가늠할 수 없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지. 그들의 존재, 뜨거움, 위력, 온도 그 모든 것을. 그 안에 손을 집어 넣지 않아도, 겪지 않아도. 어쩌면 겪었을 수도 있겠다. 사라진 기억 안에 그 감각들이 남아있을지도 몰라.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내가 그 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의 살아있음을 알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난, 정말 나는 지금과 다를까. 그 삶의, 살아가려는, 격정적으로 생존하려는 사실만이라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결국에 재가 되는 거라면 지금 깨닫는 게 나은 쪽이라 생각해. 너에게도 그런 음성이 있겠지? 나에겐 타들어 가는 것과 같은 소리라면 너에겐 무엇이니. 무엇이 들리니. 그들도 시끄럽고 때론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격렬하니?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 소음 속에서 난 아직 살아있어. 너와 함께 그 소리를 들으며.

 

 

우와 연

 

 

  우는 카페 사장에게 가 음악 소리를 줄여달라고 부탁한다.

 

  우   음악 소리 좀 줄여주실 수 있나요?

 

  카페의 음악 소리가 줄어든다.

  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연이 울고 있다.

 

  우   괜찮아? 내가 네 얘기를 안 들어서 그런 거야? 안 들은 게 아니라 카페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정말 들리지 않았어. 

  연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눈물이 나네?

  우   괜찮아? 정말?

 

  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우   네가 하던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줄 수 있어?

  연   별 이야기 아니야.

  우   내가 너무 궁금해서 그래. 카페 음악 소리도 줄여달라고 부탁했는데?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연   고마워.

  우   뭐가?

  연   아니. 그냥.

  우   그러니까 다시 한번만 말해줘.

 

  연은 조금 전 하던 말을 다시 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지금이 첫 번째가 아닌 거지. 우리는 지금 몇 번의 삶을 살아낸 후인 거지. 내가 열 번째의 나일 수도 있는 거지. 계속해서 이 지겨운 순간을 반복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내가 죽음을 택해도 열한 번째의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니까. 열한 번째의 나와 (사이) 한 스무 번째의 너와 다시 만나서 이 시끄러운 카페로 오게 되는 거야. 그리고 다시 내가 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너에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은 거야. 괜찮을 거지? 이미 난 아홉 번의 죽음을 맞이했을걸? 열 개의 너를 만났을걸? 열 번동안이나 난 너와 친구였을 거야.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난 계속 몇 번의 내가 되어도 너를 만나고 있을 거야. 아마도 그럴 거야.

 

  우가 울고 있다.

  카페의 음악 소리가 다시 커진다.


  •  마지막 주제는 [반복] 
  •  데킬라뮬은 [반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마지막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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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덟 번째 주제 : 꿈 

  [한여름 밤의 꿈], 데킬라뮬

 

*

 

  왜 너였을까.

 

  그래, 너의 달리는 모습이 멋져 보이긴 했지만. 숨을 몰아쉬다 그 커다란 물병을 통째로 입에 가져다 대고 마시던 그 모습에, 물을 삼키는 목의 떨림에 시선을 도저히 돌릴 수 없긴 했지만.  너 때문이라고 생각해. 물병을 벤치 위에 놔둬 달라고 부탁한 건 너잖아. 나는 가만히 서 있던 죄밖에 없는걸. 아니,

 

  나도 마셔도 돼?

  어.

 

  내가 입 대고 마시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 편하게 마셔, 입 대도 돼, 라고 했던 것도 너잖아. 그 때문인 거야. 너와 내가 얽혀 있는 채로 꿈속에 나타난 건. 

 

  너의 무거운 체온이 나를 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내가 아직 철 지난겨울 이불을 덮고 배 위에는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어. 어쩐지 서늘한 손길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 뒷목과 어깨를 한 번 쓸어보기도 하고. 느껴지는 건 그저 땀에 젖은 내 피부와 들러붙어 있는 머리칼들이었어. 내 침대가 이렇게 크게 느껴진 건 처음이야.  

 허전한 게 당연하지, 눈 뜨기 전만 해도 네가 여기 나와 함께 누워 있었으니까. 아니, 심지어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었던 게 아니고,

 

  알람이 울린다. 교복이 다 말랐으려나.

 

*

 

  교실 뒷문을 열자마자 네가 보여.  너는 평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나와는 일 년에 말을 한 두 번 섞어볼까 말까 한 친구들. 그러니 그 가운데 대장처럼 앉아있는 너는, 내겐 너무 먼 사람이지. 평소엔 너무나 잘, 거의 자동으로 접히던 마음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꿋꿋하게 서 있어. 쿵쿵거리면서. 구겨지지 않을 거라고 선언이라도 하듯이. 오늘은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어. 너의 체온이 꿈속에서 느꼈던 것만큼 따뜻한지, 알아보고 싶어. 그런 허튼 생각이 자꾸 가능할 것만 같아.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 그 소리가 너의 의자에서 난다는 걸 나는 바로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너의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네. 설마, 정말로? 

 

  네 모습이 내 눈앞에 있길 바라면서 시선을 올렸을 때, 너는 휑, 내 뒤를 지나 교실 뒷문을 열어. 야, 한지, 또 똥 싸러 가냐? 네 무리 중 한 명이 깔깔거리며 외치고, 너는 교실 안으로 머리만 쏙 빼고, 아 생리 중이라고! 하고 받아친다. 갑자기 나도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는 것 같아. 손이라도 씻고 싶어 지는데, 하면서 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그만, 이건 너무 비참한 것 같아  도로 주저앉았어. 오늘은 그냥 책상 앞에만 딱 붙어 있어야지.

 

*

 

  그 꿈을 꾸어서 좋은 게 딱 한 가지 있어. 수업이 너무 지루해지면 그 장면을 반복 재생하면 되거든. 시간이 아주 쏜살같이 지나가더라. 창밖의 구름처럼 내 머리도 교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 오후 수업 시간에는 거기에 다른 장면들을 더 추가하기 시작했어. 5교시엔 네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는 것에서 시작했다가, 6교시엔 내 고백을 네가 받아주는 것에서 시작하고, 7교시에는 무얼 또, 세영아! 

 

  어? 아직 쉬는 시간인데, 네가 왜 내 눈앞에 있을까. 

  나 법정* 모르는 것 좀 알려주라.

  그제야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네가 들고 있는 교과서와 문제집을 발견해. 교과서도 문제집도 밑줄이고 동그라미고 모두 연필로 그어져 있어. 너는 필기를 이렇게 하는구나.  

  너는 교과서와 문제집을 비교해가며 질문을 하고, 나는 최대한 자세히, 그리고 천천히 답을 하려고 해. 그건 너의 이해를 위해서라기 보단, 알지? 

  너는 설명을 듣기 위해 내 옆자리에 앉고, 몸을 가까이 내 쪽으로 기울이고 있어. 내 얼굴과 가까운 쪽으로. 닿지 않았는데도, 네가 지닌 온기가 느껴져. 너는 숨소리가 느리고 조용하네. 감각에 온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해. 내가 네 물음에 제대로, 잘 답변을 해줘야 네가 다시 나에게 물어볼 테니까.

  또 물어볼 것 없어?

  응, 이게 다야. 고마워.

  물어볼 것 있음 또 와.

  너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는 네가 다시 안 올 수 있다는 걸 알아. 네가 나에게 뭔가를 물어본 적도 이번이 거의 처음인걸. 그러니 너에게 내가 간밤에 이런 꿈을 꿨다고 얘기하는 기회도 없겠지. 영영.

 

  7교시에는 아무 상상도 하지 못했어.

 

*

 

  다시 너야.

  네가 우리 집 베란다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네. 나도 반갑게 답을 해. 어서 들어와. 거기 왜 그러고 서 있니.

 

  장면이 바뀌어. 나는 땅 위에 있어. 아주 낮은 곳에. 나를 내려다보는 반 친구들이 보여. 그중엔 너도 있고, 너의 무리 친구들이 있고, 나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어. 나를 비웃고 있어.

  너희들이 나에게 던지고 있는 것은 노란 해바라기야. 활짝 핀 해바라기가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던져져.

 

  그만해, 제발. 눈을 꼭 감았는데 너희들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아. 눈을 떠도 네가 보이고 감아도 보여.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네. 땅을 짚어야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간힘을 쓰다가,

 

  눈을 떴어.

  내 방 천장이 보여. 다시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고. 나는 왜 아직 여름 이불을 꺼내지 않았을까. 해가 뜨면 당장 이불을 세탁기에 넣어 두고 여름 이불을 꺼내야겠어. 우선 지금 당장은 이불을 그러모아 품 안에 안아. 천천히 숨을 쉬자. 너의 숨소리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들이쉬고 내쉬어.

 

*

 

  서진여자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뜻깊고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교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은 소란스러워져. 곧 담임 선생님이 몇 가지 전달사항을 얘기하고 나면 한 달이 넘게 이 교실은 비어 있겠지. 한 달이 넘게, 나는 너를 볼 수 없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만큼은 너를 더 자주 힐긋거리기로 했어. 네가 날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뭐 어때. 너는 오늘 학교가 파하고 친구들과 놀러 가는 동안 나를 까맣게 잊을 텐데.

  선생님은 오늘따라 말을 짧게 끝내고, 반 친구들은 신이 나서 교실 문으로 달려 나가. 너는 설렁설렁 그 뒤를 따라가고. 너의 시선이 나를 짧게 지나치고, 방학 잘 보내, 세영아, 너는 그렇게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지. 나는 겨우 너도,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아직도 네가 꿈에 나왔으면 좋겠어.


  * 법정: 법과 정치 과목의 줄임말

 

  •  다음 주제는 [처음] 
  •  믹스키트는 [처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Posted by 데킬라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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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 번째 주제 : 골목길 

  [꿈속 골목길 꿈속], 믹스키트

 

*

 

  D는 어떤 골목길이 나오는 꿈을 꿨다고 했다. D는 그 꿈이 너무 생생해 꼭 실제로 거기에 가본 것만 같다고 말했다. 내가 "어릴 때 가본 거 아닐까?"라고 묻자, D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D는 꿈속 골목길이 여기의 골목길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고 했다. 확실히 한국의 골목길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단 한 번도 외국에 가본 적 없는 자신이 꿈속 골목길도 가본 적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나는 D의 단단한 확신을 깨기 위해 "아마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 골목길을 봤을 거야."라는 말로 받아친다. 하지만 D는 고개를 아주 크게 젓는다. 그러고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이었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D의 고집을 꺾고 싶다. 하지만 D의 꿈속 골목길은 그 무엇보다 견고해 쉽지 않다. D를 만나기 전 이러한 상황을 예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 내 마음속에는 말려야 한다는 마음과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다.

 

  며칠 전, D는 꿈속에서 그 골목길에 갔다 온 후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너머의 D는 엄청나게 흥분한 상태였다. D는 그 골목길에 대해 마구 설명하기 시작했다. 

 

  D의 말에 따르면 골목길은 이러한 모습이다. 골목길 양옆에는 흰 눈이 가득 쌓여있다. 누가 치워둔 눈은 D의 허리 높이 정도다. 지금은 낮이고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서점과 유리공예를 하는 가게가 있다. 왼쪽에는 바람을 주의하라는 표지판이 있고 그 뒤에 마당이 딸린 이층집이 있다. 그 집 창문에는 엑스자로 녹색 테이프가 붙여져 있다.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다. 태양이 강하게 내리쫴 눈이 부시다. 바닥에 쌓인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D는 눈을 찌푸리고 있다. D는 별로 춥지 않다고 느낀다. 날이 맑아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D는 골목길 끝을 바라본다. 바다다. 골목길을 쭉 따라 걸어가면 바다가 나온다. 파도가 넘실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갈매기가 우는 소리도 함께다. D는 바다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골목길을 따라 쭉 걷기 시작한다. 눈을 밟는 소리가 깨끗하다. D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편안하다고 느낀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이곳에서 홀로 바다로 간다는 사실에 들뜬다. D는 계속 걷는다. 바다에 닿을 때까지. 골목길 끝으로 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D의 코트와 머리카락이 심하게 흩날리고 있다.

 

  D는 꿈속 골목길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에게 말했다.

 

  "꿈속 골목길에 꼭 갈 거야. 너무 가고 싶어. 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 골목길을 찾고 싶어. 눈을 밟으면서 바다로 향하고 싶어.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의 골목길에서 혼자가 되고 싶어."

 

  나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 골목길을 찾을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D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D가 떠난다면 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D가 나에게 꿈속 골목길과 같은 사람이니까. 

 

  그러자 D는 

 

  "꼭 찾아낼 거야.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든."이라고 말하고 정말 떠났다.

 

**

 

  D의 편지를 받은 날이었다. 편지에는 자신이 대만과 필리핀을 거쳐 지금 일본에 왔다고 적혀 있었다. D는 그 꿈속에서 간 골목길을 일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일본의 골목길이 자신의 꿈속 골목길과 굉장히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D가 빨리 그 골목길을 찾고 돌아오길 바랐다. D가 없는 여기에서의 나날들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D가 없는 내 일상은 끝이 없는 골목길을 걷는 것과 같다.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에 닿지 않는 느낌. 내 안에 꽉 찬 이야기를 쏟아낼 사람이 없기 때문일까. 난 계속 헤매고 있다. 나도 모르는 골목길 사이 사이를.

  D의 편지는 골목길을 찾는 이야기로 시작해 나의 안부를 묻는 거로 끝이 났다. 그리고 편지 봉투 안에는 대만과 필리핀의 골목길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D는 두 팔로 엑스자를 만들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 뒤에는 "빨리 꿈속 골목길을 찾아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D의 편지를 읽으며 집 앞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밤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얌마."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목길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주위 집들의 불이 전부 꺼져 있는 상태였다. 누가 나를 불렀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내 앞에 자그마한 돌멩이들이 우두두 떨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담뱃불을 끄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다시 한번 돌멩이들이 우두두 떨어졌다. 어디에서 날아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누가 돌멩이를 던지는지 찾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누구인지 찾는 나를 바라보며 남자가 비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 내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또 한번 돌멩이들이 떨어졌다. 나는 도어락을 빠르게 누르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잠금장치 세 개를 전부 채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심장의 속도가 진정되지 않았다.

  D가 보고 싶다. 하지만 D는 여기 없다. 나는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꿈이었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내가 잘못 본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 우리 집이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라는 사실에 두려워진다. 나의 집, 나의 집 앞 골목길에서 도망치고 싶다. 

 

***

 

  D는 꿈속 골목길에 도착했을까? 나의 골목길을 두고. 왜 D는 나를 두고 혼자가 되는 선택을 한 걸까. 아니, 난 왜 D에게 화가 난 거지. D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 화를 내려면 돌멩이를 던진 남자에게 내야 한다.

  D는 그 골목길에서 눈을 맞으며 바다로 향하고 있을까? 혼자가 되어버린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까? 난 더는 혼자 이 집에서, 이 집 앞 골목길에서 살 수 없을 거다. 꿈과 같은 순간이 계속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돌멩이가 내 앞에 계속 떨어지는 것만 같다. 우두두, 우두두.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얌마, 얌마, 나를 찾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D를 만나고 싶다. D와 D의 골목길을 찾아 떠나고 싶다. D와 함께 그 골목길을 걷고 싶다. 눈이 가득 쌓인 골목길을 걸으며 나의 골목길에 관해, 내가 공포에 떨었던 순간에 관해 마구 쏟아내고 싶다. 골목길을 헤매는 걸 그만두고 싶다. D는 자신을 찾아온 나를 반겨줄까? D는 나의 골목길을 받아줄까? 모르겠다. 그런데 D를 보고 싶다. D의 옆에 있고 싶다. D의 골목길에 가고 싶다. 나의 골목길을 버리고.

 

****

 

  여기구나. 내 꿈속 골목길. 너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D는 두 팔을 들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본다. 


  •  다음 주제는 [꿈] 
  •  데킬라뮬은 [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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