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 번째 주제 : 동네 


  [동네 친구], 데킬라뮬

 

  오늘도 발자국 소리에 잠을 깬다. 나는 서둘러 어두컴컴한 그 아래를 벗어난다. 간밤에 누구에게서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던 보금자리가 곧 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라질 것이다. 가끔 운이 좋으면 이 지붕이 이동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러는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에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면 우선은 피하는 쪽이 좋다.

  하품을 연신 뿜으며 햇살 아래로 나온다. 털이 뽀송이 마르는 느낌에 기분은 좋지만 뱃속이 허해서인지 기운은 없다. 일주일이 넘게 그녀가 통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가득 채워지던 밥그릇이 내내 비어있다. 둘 중 하나겠지. 내가 동네 바깥으로 산책을 나간 그 몇 시간 사이에 그녀가 이사를 갔거나, 아님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그렇다 한들 상관은 없다.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게 처음도 아니고. 다만 그간 편안히 배를 채울 수 있던 지난 반년의 시간이 그리워질 뿐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인간도 조금은 그리워질 것 같다. 그녀가 이대로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녀와의 첫만남은 여느 다른 인간들하고는 달랐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를 보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거나 아님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는다. 그건 내가 보통은 어딘가에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거나, 햇볕을 쬐고 있거나, 아님 어딘가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쓰레기봉투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내 소리를 듣고 그녀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녀의 놀라는 소리에 아주 놀라고 말았는데, 보통 내가 음식을 구하는 모습을 인간들이 발견할 경우 뒤이어 대개는 나쁜 일들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벗어날 때까지 욕설을 듣는다든지, 무언가 딱딱한 것에 맞는다든지 하는. 하지만 그녀는 이후에 딱히 별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시선이 더 오래 이어지기 전에 재빨리 도망쳤지만.

  그 이튿날이었다. 먹을 걸 구하러 다시 쓰레기 더미로 가는 길목에서 새것으로 보이는 밥그릇과 물그릇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함정인가? 지난번 내가 쓰레기봉투를 뒤진 것에 대한 보복인가? 나는 그리로 갈 생각이 없었다. 여하튼 그녀는 다른 인간들하고는 달랐다. 내가 멀찍이 떨어져 그냥 밥그릇을 노려보고 있자 그녀는 갑자기 물그릇을 들더니 그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모금 벌컥 마시고는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설마 밥그릇에 든 것도 먹을 생각인가. 한 입이라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우선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입 먹는 순간 모든 의심은 사라졌다. 밤거리를 전전하며 구했던 음식들에 비하면 훨씬 질 좋은 맛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물이 적어졌다 싶을 때 더 채워주기까지 했다.

  식사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매일 저녁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에 그녀는 항상 같은 자리에 밥그릇과 물그릇을 놔두었다. 물그릇은 낮에도 자주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밥을 먹기 시작할 때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나를 야옹이나 나비 같은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그냥 나의 배를 채워주고, 가끔씩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녀의 그런 거리두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다른 인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식사 공급이 끊기는 걸 막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예쁘게 몸 단장을 하는 데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루 이틀 밥그릇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주일이 넘도록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배가 고프다는 감각 이후에 찾아온 건,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것 같은 불쾌한 감정이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다가 돌을 맞는 것과 같은 어떤 나쁜 일이. 

 

  우선은 먹을 것을 찾으러 돌아다니기 전에 부족한 잠을 먼저 채워야 했다. 햇살이 좋으니 공원 덤불 안에 누워 있고 싶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우연. 그녀다. 이 공원에서 그녀를 본 건 처음이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공원이지만 그녀가 이곳을 지나다니거나 여기서 운동을 하거나 하는 장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심지어 그녀는 어떤 남자와 함께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남자인가?

  여자가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처음 본다. 아니, 말하는 거라기 보단 고함지르는 것에 가깝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여자가 돌아섰을 때, 남자는 갑자기 여자를 끌어안는다. 여자가 몸부림을 치다가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남자는 그녀로부터 떨어진다. 벌게진 얼굴과 일그러진 표정. 인간들이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다. 그녀는 화가 났다. 아니, 몸은 잔뜩 움츠러져 있는 걸 보니 겁을 먹은 건가? 내가 일주일 간 제대로 된 밥을 못 먹고 있는 것이, 저 남자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직감과 함께, 번뜩 기억이 스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밥그릇을 채워줬던 날. 발에 무언가가 채이는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땐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그렇게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도 저 남자였을까? 지금처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

 

  해가 지고 있다. 그녀가 이사 간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오늘 저녁은 그녀 집 앞을 어슬렁거려 보기로 한다. 나는 그녀가 사는 빌라 맞은 편 담벼락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평소 밥을 주는 시간이 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볼 것이다. 길거리에 오가는 발걸음이 뜸해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좀이 쑤셔온다. 계속 기다려봤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담벼락 아래로 아까 그 남자가 지나간다. 역시나 그녀가 사는 빌라 앞에 멈춰 선다. 남자는 무언가를 귀에 대고 말하기 시작한다. 남자의 목소리는 작았다가 커졌다가, 느려지기도 했다가 사납게 빨라지기도 한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가, 별안간 목소리가 그친다. 남자는 그녀가 사는 집 쪽으로 성큼 걸어가고 있다. 그를 그대로 놔두면 정말 영영 그녀를 못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는 담벼락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그의 발을 향해 돌진한다.

 

  경찰차에 실려가기 전 남자는 핏자국을 남겼고, 다행히 그건 그 남자 자신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피의 쇳맛에 기분이 영 좋진 않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가 내 밥이 든 그릇을 들고 나오는 중이니까.

  고마워, 친구야.

  그녀가 나에게 한 첫 마디였다. 이젠 밥을 먹는 동안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다음 주제는 [골목길] 

  •  믹스키트는 [골목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Posted by 데킬라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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