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구저쩌구 8] 2021년 7월 27일, 수목  

 

  삶은 무의미한 상태로 존재하는 무언가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가치를 창조해야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낼 때,
  혹은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에 필연을 느낄 때
  나는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감정은 무엇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처럼 무언가를 '태우고 빛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살아있음은 상실을 필요로 한다. 
  온기는 내 안의 무언가가 소진되었을 때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진된다는 것은 잃어버리는 과정이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끊임없이 내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늙어간다. 
  나라는 존재가 유한하다는 느낌은 공허를 동반한다. 
  삶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이러한 사고회로를 반복하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작고 추한지
  그리고 삶이 얼마나 거대하고 아름다운지
  사이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  [어쩌구저쩌구]는 [어쩌구저쩌구 8]로 끝이 납니다. 지금까지 [어쩌구저쩌구]와 수목 님과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


  •  [어쩌구저쩌구 7] 짧은 글 5, 수목  

 

  5. 내가 가장 절박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바로 와주지 않고 항상 시간차를 두고 온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내가 그것을 가졌다는 걸 인식조차 못할 때 비로소 손에 잡힌다

  그 전의 방황은 그것과 닮은 허상들을 통해 위로받으려는 조급한 마음이다

 

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


  •  [어쩌구저쩌구 6] 짧은 글 2, 3, 4, 수목  

 

 

  아래는 두서 없는 생각을 기록했던 자투리 글의 모음이다. 

 

  1. 예술교육은 예술이라는 방법으로 세상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교육이다. 다시 말해, 예술교육은 예술이라는 새로운 언어의 학습이다. 

   따라서 예술교육은 예술을 낯선 것이 아닌 친근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 기존에 이루어졌던 예술적 논의들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것이지, 이해 불가한 발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가 무언가를 꾸미는 데에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종종 허영과 동일시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예술을 어려운 분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예술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아름다운 예술은 무언가를 흉내 낼 때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 존재할 때 발생한다. 예술이 나와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예술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심화되지 않은 보편적인 예술교육에선 이 인식을 심어주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다. 이 인식은 곧 예술에 대한 자발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 내가 사람으로서 가지는 복합성을 인지할수록 어릴 때 느꼈던 단순한 행복감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무지에서 벗어나고 세계관이 넓어지며 드러나는 좋은 현상인지 무감각이나 권태에 익숙해지는 좋지 못한 현상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분간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도 알 수 없다. 

 

  3. 세상은 크고 나는 너무 어리다. 결국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 그 사실이 더 이상 슬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에 깊은 애정이 있지만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며, 내가 스쳐지나가는 작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될 때의 자유로움이 있다. 또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살기 위해 시도하는 절박한 몸부림에서 느껴지는 경외감이 있다. 그것들을 생각했을 때 나도 다시 살아갈 수 있다. 

 

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


  •  [어쩌구저쩌구 5] 갈대, 수목  

 

 

  나는 계획과 체계를 좋아한다. 이것은 안정성을 보장해주며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에서 내가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확인받는 사실은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삶은 가치체계와 별개로 존재하며, 자연의 객관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기에 그 안에서 주관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나는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갈대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시시때때로 흔들린다. 꼿꼿한 나무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채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 상태가 가장 두드러졌을 때가 고등학교 때였다. 좋아하는 전공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시를 치르는 입장에서의 나는 항상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이 외부에 맞춰져 있었으며, 나를 나로서 바라보지 못했다. 그 시기의 나는 결과를 내기 위한 삶의 패턴이나 끊임없이 내 결핍을 마주하고 고쳐나가야 하는 과정에 지쳐있었지만, 성인이 되어가고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으레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수능 국어 지문을 공부하다가도 그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는 화자를 만나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개 중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것은 성삼문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세조 앞에서 <이 몸이 죽어가서>라는 시조를 노래한 사육신이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시조의 내용은 다른 사람이 하얀색으로 퇴색되어도 자신만은 죽어서도 소나무가 되어 혼자 푸른색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이 시는 당시 들었던 어떤 말보다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살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1차적인 본능인데 그걸 거스르게 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죽음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시를 읊었을지 생각하니 문득 눈물이 나왔다. 동시간대에 살거나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진실되게 삶을 살아왔는지가 와닿았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영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위 사건을 시작으로 차츰 매너리즘에서 벗어났던 것 같다. 내가 왜 내 전공을 하고 싶은지, 또 삶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했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는 흐름 속에 흔들리는 작은 존재에 불과했지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불안정성이 나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세상은 언제나 복합적이고, 삶은 항상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시간대를 살든, 어떤 공간에 있든 똑같이 적용되는 전제였다. 우리 모두 세상의 일부로서 유한한 상태로 존재하였으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때로 흔들리고 약해졌다. 우리 모두 삶에서 결핍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


  •  [어쩌구저쩌구 4] 짧은 글 1,   

 

2021년 6월 24일(목)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이 질문 하나만으로 부담을 느낀다. 
이런 질문들은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너무 무겁다.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진중하게 대답하기도 한다. 
혼자 너무 깊게 파고 들어갈 때면,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가 싶다.

요새는 내가 세상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나라는 생각도 든다. 
어떤 관계든, 성취이든, 혹은 삶 그 자체이든 나는 기대하는 것이 너무 많다.
사실 그것들은 나와 별개의 독립적인 개념으로 존재할 뿐인데 
나는 끊임없이 그들과 나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 어떻게든 가치를 부여하려는 것 같다. 
의미가 성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끝에서도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그러려고 한다. 
절박함에서 나오는 이러한 행위들은 희망적인가? 혹은 자기파괴적인가? 
이 행위의 끝에서 나는 항상 지치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된다.

혼자 하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변은 없다.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