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구저쩌구 3] 작업고민 1
스파이시 두리안/[어쩌구저쩌구] 수목 (끝) 2021. 4. 17. 12:36 |- [어쩌구저쩌구 3] 작업고민 1, 수목
2021. 04. 16(금)
삶에 있어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사실을 주기적으로 상기하게 된다. 어떤 것의 본질을 보는 일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표면만을 부유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어떤 것을 지속시키기도 전에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끝을 맞이한다. 혹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나간다. 유한함은 자연스러운 삶의 특성이다.
한 가지 모순적인 점은 위의 내용이 자연스러운 삶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거부하거나 망각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3월 19일자 내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상이라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든다.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세상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인 행위 아닌가?
한 달 후의 나는 가치를 가지지 못한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현실의 것들이 쉽게 오고 가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최선의 안정성은 이상과 가치체계에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에 수긍한다. 가치체계를 따르게 되면 방향성이 보인다. 주변 상황들에 흔들리지 않으며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게 된다. 나는 그런 명료함을 좋아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작업을 할 때도 이러한 갈등은 지속된다. 나는 어떤 절대적인(내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이기도 하지만)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삶의 다른 요소들을 포기하는 게 익숙하고, 번아웃 상태를 주기적으로 경험한다. 작업을 할 때 재미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작업은 자기소모적인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는 내가 작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변함 없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작업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 내 자아를 작품에 드러내는 일은 힘들고 예민해지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준 만큼 표현된다는 점에서 동등하며, 가장 나답다고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작업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고 진실한 것이다. 관계나 상황이라는 불안정성에 얽매이지 않고 누군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놓는' 행위이다. 삶의 유한함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끝까지 놓지 못한다. 나는 절대적인 소통 수단을 바라본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뒤에는 확신을 잃었다. 21년도에 하고 있는 작업은 불완전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내가 완전성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방향성을 잡기가 어려웠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내가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창작된 인물에게 자아를 부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현재는 그 의문을 누른 채로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작품을 진행하며 답을 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어쩌구저쩌구 4]는 4월 24일(토)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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