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구저쩌구 5] 갈대
스파이시 두리안/[어쩌구저쩌구] 수목 (끝) 2021. 7. 3. 13:47 |- [어쩌구저쩌구 5] 갈대, 수목
나는 계획과 체계를 좋아한다. 이것은 안정성을 보장해주며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에서 내가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확인받는 사실은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삶은 가치체계와 별개로 존재하며, 자연의 객관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기에 그 안에서 주관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나는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갈대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시시때때로 흔들린다. 꼿꼿한 나무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채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 상태가 가장 두드러졌을 때가 고등학교 때였다. 좋아하는 전공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시를 치르는 입장에서의 나는 항상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이 외부에 맞춰져 있었으며, 나를 나로서 바라보지 못했다. 그 시기의 나는 결과를 내기 위한 삶의 패턴이나 끊임없이 내 결핍을 마주하고 고쳐나가야 하는 과정에 지쳐있었지만, 성인이 되어가고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으레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수능 국어 지문을 공부하다가도 그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는 화자를 만나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개 중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것은 성삼문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세조 앞에서 <이 몸이 죽어가서>라는 시조를 노래한 사육신이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시조의 내용은 다른 사람이 하얀색으로 퇴색되어도 자신만은 죽어서도 소나무가 되어 혼자 푸른색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이 시는 당시 들었던 어떤 말보다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살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1차적인 본능인데 그걸 거스르게 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죽음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시를 읊었을지 생각하니 문득 눈물이 나왔다. 동시간대에 살거나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진실되게 삶을 살아왔는지가 와닿았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영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위 사건을 시작으로 차츰 매너리즘에서 벗어났던 것 같다. 내가 왜 내 전공을 하고 싶은지, 또 삶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했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는 흐름 속에 흔들리는 작은 존재에 불과했지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불안정성이 나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세상은 언제나 복합적이고, 삶은 항상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시간대를 살든, 어떤 공간에 있든 똑같이 적용되는 전제였다. 우리 모두 세상의 일부로서 유한한 상태로 존재하였으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때로 흔들리고 약해졌다. 우리 모두 삶에서 결핍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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