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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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버전]

 

  망가진 달력

 

  달력을 펴고 기억의 앞에 선다 

  달력에 비친 내 얼굴 깨버리고 싶어

  내일을 살아갈 수 없다 

 

  달력을 내리친다

  점점 형체를 잃는 숫자

  칸막이 방들만 남는다

 

  방의 수만큼 나는 늘어난다

  한 방에 한 명의 내가 들어간다

  방구석에는 침대가 하나씩 있다

  하루를 끝마친 몇십 명의 나는 몇십 개의 침대에 눕는다

 

  두 눈을 감는다. 날 미워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어제, 오늘, 내일. 점점 그것들은 머릿속 곳곳을 장악한다. 나는 빠르게 차오른다. 눈물이 된다. 침대 속으로 깊숙이 배어든다. 개수를 셀 수 없어질 때까지 늘어난다. 

 

  축축해진 침대,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눈물 침대는 물풍선처럼 부푼다

  침대의 꼭짓점이 뭉툭해진다 

  수많은 침대는 몸을 맞대며 달력을 가득 채운다

  방들 사이 경계는 지워진다

 

  펑, 터져버릴 것만 같다

 

  매일의 나는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른다

 

  펑, 하고

 

  하나가 터진다 또 터진다 연달아 터진다 

 

  달력은 축축해진다 

 

  사라지는 

  매일 

  사라지는 

 


 

[뉴-버전]

 

  망가진 달력

 

  벽에 걸린 달력을 본다

  내게는 남겨진 약속이 단 하나도 없고

  여럿의 텅 빈 정사각형 방 속

  여럿의 나만 가득하다

 

  여기도 그렇게 만들기로 한다

  내가 나를 부르면 내가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집 바깥으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하니

  문을 열고 나온 얼굴이 일그러진 옆집 이웃이

  버릴 거면 자기가 가져도 되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옮기고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놓게 될 물건은 

  애정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노트

 

  하지만 어디에도 그건 없고

  그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텅 비어버린 방 한가운데 누워  

  잃어버린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되돌아오는 건 내 이름뿐이다

 

  두 눈을 감고

  복사될 오늘의 기약 없음을 세어본다

 

  벽에 걸린 달력 속 

  여럿의 정사각형 방 여럿의 내가

  사라지고 있다

 

  내가 날 훔쳐 달아나고 있다

  내가 없는 날 부르고 있다

 


 

  [2018-버전] 

  

  달력 속 나는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매일 울었고, 매일 숨었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상상할 수 없는 내일을 정말로 상상하지 않았다.

  

  내일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뉴-버전]

 

  나의 달력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내가 나의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여전히 그건 어려운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나의 노트에 애정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게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전까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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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버전]

 

  성냥의 머리칼

 

  굳게 닫힌 내 이목구비

  나는 미용실로 간다

 

  짧게 잘라주세요

  고개 끄덕이는 미용사 

  나와 미용사 사이 이어지는 선 하나

 

  미용사는 내 머리칼을 한 움큼 잡는다

  잘라낸다

 

  .......

 

  점으로 흩어지는 선

  공기로 퍼져나가는 먼지

 

  선이 점이 되는 마음을 배운다

 

  *

 

  거울 속 빨간 성냥 하나

  너는 발화하지 못하는 빨간 인간

 

  불을 주는 사람은 있었다

  내가 옮겨 받지 못했을 뿐

 

  원래 성냥은 머리칼이 없는 걸까, 아니면 이미 잘려나간 건가, 성냥이 가는 미용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발화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바닥에 머리를 긁는다

  떠나간 점들이 떠오른다

 

  크게 입을 벌려 차가운 숨을 마셔본다

  성냥의 머리는 두둥실 하늘로 날아간다

 

  노을이 진다

  발화하지 못해도 괜찮다

 


 

[뉴-버전]

 

 

  폭풍 후 

 

  내가 필요할 때만 편지를 보내는 네가 있고 그 편지를 전달하는 우체부는 그 사실을 모른다 폭풍우가 치는 밤마다 우체부는 비에 젖은 상태로 우리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지만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 때문에 방문을 알아챌 수 없다 그러다 우연히 누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그런 밤에는 문을 열 수 없다 편지를 읽게 될 것이기 때문에 집이 홀라당 젖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우비를 뒤집어쓴 자의 눈빛이 무서울 것이기 때문에 날 집 밖으로 끄집어낼 것이기 때문에 폭풍우를 뚫고 친구에게로 가다 죽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날도 마찬가지로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고 너는 나에게 쓰고 있었다 편지를 배달하기 위해 찾아온 우체부는 잠겨있지 않은 너의 집 문을 열었고 거기가 온통 젖기 시작했다 바람이 휘몰아쳐 글씨가 번지고 비가 세차게 내려 편지지가 흐물흐물해지고 그러다 정전이 되어 깜깜해졌는데 다 쓰지 못한 너는 개의치 않았다 우체부를 기다리게 두고 폭풍우로 가득한 집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쓰고 있었다

  , , , , , 이 필요하다고 쓸 때마다 불이 지워졌다

 

  결국 폭풍우가 치는 밤은 지나갔고

  나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문 앞에는 수천 장의 편지가

  거기에는 폭풍우가 지나간 흔적이

 

  축축한 더미 속 번져버린 글자 때문에 네가 요구하는 걸 단 하나도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너에게 필요했던 건

 

  불을 주는 사람이었겠지 

 

  너에게 불을 주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폭풍우가 치는 날에만 그게 필요했을 뿐

 

  폭풍 후 네 집은 금방 마르고 너는 날 찾지 않게 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폭풍우가 치는 밤마다 문을 열지 말지 고민하게 된다

 


 

  [2018-버전] 

  

  나는 나를 미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애정을 주어도 옮겨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에 서툴렀다. 스스로 발화하는 게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성냥의 머리칼'을 쓰며 노력하려고 했던 것 같다.

  바닥에 머리를 긁으면서. 

 

  [뉴-버전]

 

  '성냥의 머리칼'에서

   

  불을 주는 사람은 있었다

  내가 옮겨 받지 못했을 뿐

 

  이 두 행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불을 옮겨 받지 못하는 사람에 관해 쓰고 싶어졌다.

 

  불을 옮겨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을 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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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버전]

 

  방패연

  

  오늘 아침에 너는 가오리연을 날리고 싶다고 했고 오늘 낮에 나는 온 마을 문구점을 돌아다녔다 아무리 찾아도 가오리연이 없어 방패연을 사 들고 집으로 왔다 퇴근을 하고 돌아온 너는 방패연에는 구멍이 있어 싫다고 했다 나는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줄이 끊어질 거야, 라고 말했고 너는 이면지를 가져와 구멍을 막았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집에 있었다 

 

  너는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운동장 끝에서 끝으로 달렸다 방패연은 날지 못하고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운동장에 있었다 너는 줄을 짧게 줄이고 더 빠르게 운동장 끝에서 끝으로 달렸다 방패연은 잠깐 날아오르다 추락했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내 옆에 있었다 너는 야! 좀 잡아봐, 라고 소리쳤고 나는 방패연을 잡고 너를 따라 운동장 끝에서 끝으로 달렸다 방패연은 점점 날아올랐고 너는 다시 줄을 길게 늘어뜨렸다 방패연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허공에 있었다

 

  팽팽해진 줄 그러나 끊어지는 줄 날아가는 방패연 

  방패연을 따라 달려가는 너

  점점 멀어진다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뉴-버전]

 

  방패연

 

  방패연을 날리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너였고 

  종일 온 마을 문구점을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없었어 네가 원하는 건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건 마치 실제로 스노우볼 속에 사는 사람을 만날 확률과 같아서 

  계속 둥그런 유리 벽을 두드리게 된다 

  

  벽 뒤로 내리치기 시작하는 눈보라와 

  그 속도로 두꺼워지는 스노우볼

 

  미발견 인간이 늘어나고 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할 때였어.

  방패연을 날린 게. 빙판 위에서 길게 줄을 늘어뜨리고 힘껏 달린 게.

  미끄러진 발이 허공을 내디뎌도, 몇 번이나 넘어져도, 그래야만 했어. 얇아지는 소리를 듣지 못해 깨지는 틈 사이로 두 발 전부 빠져버려도, 내가 홀라당 젖어버려도, 그래야만 했어. 얼음 아래에서 숨을 참으면서도, 방패연을 날려야만 했어. 

  

  발견되고 싶어서

 

  정작 아무도 날 보지 못해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지만

 

  얼레를 꽉 쥐고 있었다고 했다

 

  이 모든 건 미래의 일이야

  미래는 상상에서 오고 상상은 스노우볼을 깨트리는 용기에서 오지

 

  그러니까 방패연을 구해줘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구하지 못한 모든 게 네 손에 들려있었고 마침내

 

  너는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빙판 끝에서 끝으로 달린다 방패연이 날지 못해 줄을 짧게 줄이고 더 빠르게 빙판 끝에서 끝으로 달린다 방패연은 잠깐 날아오르다 추락한다 네가 좀 잡아봐! 라고 소리쳐 잡는 척하고 널 따라 빙판 끝에서 끝으로 달린다 방패연은 점점 날아오르고 너는 다시 줄을 길게 늘어뜨린다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지러워 나는 구토를 한다

  다행히도 이쪽으로 달려오는 너와 그 뒤로 추락하는 방패연  

 

  내가 영원히 깨지지 않는 스노우볼을 꽉 쥐고 있었다고 했다

 


 

  [2020-버전] 

 

  내가 친구를 이해하지 못할 때, 친구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 모든 건 방패연 때문이었을 것이고, 이제 그 방패연은 없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뉴-버전]

  

  친구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수 있지만, 단 하나 그럴 수 없는 게 있다. 그건 바로 곧 끝나게 될 친구의 미래, 그 마지막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나와 친구가 영원히 스노우볼 속의 소원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면 좋겠다. 온 마을 문구점에는 방패연이 없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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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린 시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는 과거의 시를 뒤쫓아가 보았다.

버려진 시는 과거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속에는 과거의 내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내가 있었다.

 

나는 매일 변화한다.

나의 생각, 기분, 상태, 기호, 인간관계 등은 계속 변화한다.

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변화하기 전의 내가 너무 싫어 과거의 모든 걸 피해왔다.

과거의 나와 과거에 내가 쓴 시가 내팽개쳐진 것이다.

 

이제는 한 번 예전의 나와 마주해보려고 한다.

과거의 나와 과거에 내가 쓴 시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어디로 가게 될까?

 


 

[뉴-버전]

 

과거의 믹스키트가 쓴 시를 지금의 믹스키트가 다시 써 '뉴-버전'으로 탄생시키는 프로젝트

 

(모든 게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뉴-버전 목록]

 

1. 방패연 

2. 성냥의 머리칼

3. 연약해서 사라지는

4. 망가진 달력

5. 매듭

6. 빛의 끝

7. 동전 마술

8. 꿈속 꿈

 


  •  [뉴-버전]은 격주 일요일 업로드됩니다. 
  •  [뉴-버전 1]은 2021년 5월 16일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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