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금 12] 환란의 세대
스파이시 토마토/[단막금] 데킬라뮬 (끝) 2021. 8. 22. 03:26 |
- 환란의 세대
두 사람, 각자의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각각 다른 장소에 있다. 두 사람의 노트북에는 화상 전화 창이 떠 있다. 화면 안에 각각 수와 이의 얼굴이 보인다.
수 안녕.
이 안녕.
수 오늘은 어때?
이 항상 똑같지. 그래도 오늘 하늘은 비교적 잠잠해. 너는?
수 마찬가지야. 아, 오늘 아침에 잠깐 우박이 내렸었어. 알맹이가 꽤 컸지 아마? 그 작은 창문마저도 깨질까 봐 좀 걱정이었어.
이 이런, 별 문제 없었어?
수 응, 다행히.
짧은 사이.
이 오늘은 얼마나 오래 볼 수 있어?
수 오늘은 일이 좀 많아. 음식을 구하러 가야 해서 그전에 전화를 충전시켜야 하거든. 너도 알겠지만, 전화기 충전하는 데 전기가 많이 들잖아.
이 그렇지.
수 그래서 오늘은 한 십 분 정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이 알겠어. 그런데 괜찮겠어? 또 우박이 내릴 수도 있잖아.
수 (잠시 웃는다) 하늘에서 뭐가 떨어지는 게 무서웠으면 난 벌써 집에서 굶어 죽었겠지.
이 하긴. 그런데 이미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장은 새벽에 열리잖아.
수 그래도 여긴 음식 수급이 비교적 안정적이라. 해가 지기 전에만 다녀오면 돼.
이 내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수 신경 쓰지 마, 괜찮아. 일은 어땠어?
이 괜찮았어. 오늘은 사이렌 소리도 없고. 이상한 게, 매일 듣는 소리가 안 들리는 것도 어쩐지 기분이 찜찜한 거 있지.
수 그런 날도 있어야지.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이 몇 달 전에도 그런 날이 있었어. 하늘도 깨끗하고 사이렌 소리도 없이 조용했던 날. (사이) 그날 밤에 여기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가 땅으로 꺼졌어. 지반이 무너져서.
수 기억 나, 네가 얘기해줬던 거. (사이) 별일 없을 거야.
이 그렇겠지.
사이
이 사실 이젠 뭐가 일어나도 별로 이상한 일 같지가 않잖아.
수 그래, 매번 놀라기엔 이제 지치기도 하지.
이 내 하루 중에 가장 별난 일은 너와 통화하는 거야.
수 내 얼굴 보는 게 그렇게 이상해?
이 (웃는다) 아직 기분 좋은 일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해서.
수가 따라 웃지만 곧 미소가 잦아든다.
수 그러지 마. 다른 기분 좋은 일도 분명 있을 거야.
이 지금은 없는걸.
수 만들어야지. 뭐라도.
이 내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수 너도 알잖아,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혹시라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가,
이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
수 (짧은 사이) 알았어.
이 걱정 안 해도 돼.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겠지. 사실, 평소엔 기분 같은 거 따질 여유도 없고. 다만 내가 널 볼 수 있을 때까지 만큼은 너와 얘기하고 싶을 뿐이야.
수 나도야.
두 사람은 한참 화면을 응시한다.
수 거긴 지금 몇 시야?
이 밤 10시.
수 통화하느라 계속 불을 켜 두고 있었겠네. 어서 불 끄고 자.
이 너는 곧 나가지?
수 응.
이 네가 돌아올 때까진, 기다리고 싶은데.
수 (웃는다) 나는 무사히 돌아올 거야. 우린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볼 거고. 빨리, 괜한 데 전기 쓰지 말고.
이 어차피 다른 데 쓸 데도 마땅히 없어. 괜찮아. 그치만 알았어, 네가 곧 나가야 하니까. 이만 끊을게.
수 그래. 잘 자.
이 조심히 다녀와.
수 고마워. 난 괜찮을 거야.
이 나도 알아. 우린 괜찮을 거야.
수 안녕.
이 안녕.
이의 화면이 먼저 끊어진다. 두 사람은 꺼진 노트북 앞에 잠시 앉아있다. 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 전원을 뽑고 전화기를 충전기에 연결시킨다. 이는 노트북을 닫고, 전등을 끄고, 탁자 바로 옆에 놓인 좁은 침대 위에 눕는다.
+ 이랑 님의 곡 <환란의 세대>에서 제목을 착안했습니다.
+ 그 동안 [단막금]을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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