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금 10] 혼자 있는 방
스파이시 토마토/[단막금] 데킬라뮬 (끝) 2021. 7. 23. 22:55 |
- 혼자 있는 방
방 안. 여자가 있다. 방 안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방 밖에서도 안에서도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냉장고 소리와 가끔씩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빼고는 고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다. 여자는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다. 머리칼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르자 선풍기를 끈다. 여자는 벽에 등을 대고 기대앉는다. 잠시 허공을 보고 앉아있는다. 여자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쳐다본다. 메시지를 전송하는 소리. 곧 핸드폰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주말에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여자는 웃지 않고 화면을 잠시 쳐다본다.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여자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꾸고,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여자 여보세요? (짧은 사이) 응 잘 지내지. 너는? (사이) 응. 그렇구나. 맞아 나도 요즘 그래. (사이) 모르는 것 투성이야. 응.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또 누워 있다가 정신 차리면 저녁이고. (사이) 요즘 해도 길잖아.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나면 없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사는건지 모르겠어. (사이) 일을 늘려야 할까 봐. 돈이라도 벌게. (사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욕이 막 넘쳤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어. (사이) 할 일이야 많지. 근데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냥 잠이나 자고 드라마나 보고 그랬으면 좋겠어. (여자가 웃는다) 맞아, 그럼 또 그다음에 오는 그 모든 거지 같은 기분을 견딜 수가 없어. 그냥 악순환의 반복이야.
긴 사이. 여자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고, 짧은 대답들을 한다.
여자 이런 게 코로나 블루라고 하는 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어 지금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예상하고 싶지 않고,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또 기대하고 기다리는 게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사이) 이왕 망하게 된 거, 라는 그 가정이 너무 무서워 나는. 지금 세상에는 이것도 욕심이고 사치일까? (사이) 응. 그치. 그래야지.
사이. 여자는 방 바닥에 흩어진 얇은 머리칼들을 한 데 모은다.
여자 응. 고마워, 전화해줘서. (사이) 당연 그래야지. 또 연락하자. (사이) 그래, 안녕.
여자는 핸드폰을 바닥에 두고 모아둔 머리칼을 휴지통에 버린다. 그리곤 집 정리를 하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다시 메시지를 전송하는 소리. 책상 위에 핸드폰을 엎어두고 침대 위에 쌓인 옷가지를 정리하는 여자. 곧 메시지 도착 알림 소리가 난다. 여자는 잠시 동작을 멈추지만 곧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핸드폰을 본다. 메시지를 읽으며 미소 짓는 여자. 문자에 답장을 한다.
여자는 방을 둘러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쭈그리고 앉는다. 울음이 갑자기 터져나온다. 전화 때문도 아니고, 문자 때문도 아니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 때문일 수도 있다. 여자는 소리 내어 울려고 노력한다. 엉엉 우는 소리가 마치 쥐어 짜낸 것처럼 나온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던 여자는 양 손으로 얼굴을 닦고, 숨을 고른 뒤 다시 일어선다. 여자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 [단막금 11]은 8월 6일 금요일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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