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금 9] 오후 네 시
스파이시 토마토/[단막금] 데킬라뮬 (끝) 2021. 7. 9. 01:44 |
- 오후 네 시
오후 네 시의 카페. 두 사람이 작은 사각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오후의 햇살이 카페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사람이 너무 많지도, 아주 적지도 않아 적당한 소음이 가게를 채우고 있다. 수와 잔은 편안히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수 일이 잘 맞다니 다행이야.
잔 처음엔 정말 싫었는데, 알잖아, 나 일찍 못 일어나는 거.
수 응. (사이) 늦게 출근해도 되는 회사는 없냐면서 징징댔지, 맨날.
잔 그니까. 네가 끈질기게 매일 깨우지 않았으면 나 한 달도 더 못 나가고 그만뒀을 거야.
수,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잔 면허 따고, 차도 있고, 이제 지하철로 다닐 필요가 없어져서 훨씬 나아.
수 잘 됐네.
잔 응. (사이) 넌? 아직 박물관에서 일해?
수 어, 정직원 됐어.
잔 잘됐다! 계약직 끝내고 싶어 했잖아.
수 근데 일은 뭐, 똑같지.
잔 그래도.
수 승진하면 그래도 일이 좀 더 많아질 것 같아. 좀 새로운 업무도 해보고.
잔 금방 그렇게 될 거야. 축하해.
수 고마워.
짧은 사이
잔 이 동네 얼마 만에 온 거야?
수 이쪽은 올 일이 거의 없어. 몇 주 전인가 한 번, 구청 갈 일이 있어서 잠깐 왔었어.
잔 그랬구나. (사이) 안 그리웠어?
잔과 수의 시선이 잠시 마주친다. 수,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수 올 시간도 없고. 주말에 시간 날 땐 집 밖에 나가기가 싫더라고.
잔, 미소 짓는다
잔 오늘은 나와줘서 고맙네. 너 온 김에 여기 산책이나 갈까? 우리 자주 가던 루트 있잖아. 하천 따라서 걷다가 공원에서 앉아 있다가 간식 사 먹고 했던.
수 (살짝 웃는다) 비 올 땐 가게들이 문을 닫아서 속상했는데.
잔 그럴 땐 맨날 여기 왔었잖아.
수 그랬지.
잔 오늘은 저 자리에 사람들이 있어서 아쉬워. 우리 자리였는데. (사이) 아, 너 그거 알아? 그 핫도그 집 주인 이제 다른 사람이야. 멀리 이사 가신다고, 가게 넘겨주기로 했대. 아주머니가 네 안부 물어보시더라.
수 (사이) 그래서, 뭐라고 했어?
잔 (사이) 잘 지내고 있다고 했어. 아, 그리고 거기 아이스크림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수 (말을 끊고) 이제 이런 얘기 그만 하자.
잔, 수를 쳐다본다.
잔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수 아니 그냥, 계속 옛날 얘기하는 거, 우리가 이러는 거 좀 그런 것 같아.
잔 뭐가 좀 그래?
수 우리 헤어졌잖아.
잔 그럼 이런 얘기도 못 해?
수 그냥, 넌 너고 난 나잖아. 우리 각자 삶이 있었고, 지금도 있고 그냥, 그런 얘기나 하면 안 될까.
잔 지금까지 그런 얘기 했어.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이 동네에서 우리가 같이 살았던 게 몇 년인데 얘기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수 어차피 지난 일이잖아.
잔, 수를 바라본다. 언뜻 노려보는 눈 같기도 하다.
잔 되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같네.
수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그냥 지난 일이라고.
잔 그러니까, 지난 일. 너한텐 그 모든 게 그냥 지난 일 하나로 설명되는 거야?
수 당연히 아니지. (사이) 그렇다고 다 지난 일이란 게 틀린 말도 아니잖아.
잔, 커피를 마신다.
잔 혹시 애인 생겼어?
수 뭐? 갑자기 왜 그 얘기가 나와?
잔 아니, 네가 이러는 게 혹시 지금 애인이 있기 때문에 불편해서 그런 건가 해서.
수 그런 거 아니야.
사이
잔 그럼 정말 너한테는 지난 일인 거구나.
잔, 떠날 채비를 한다.
잔 먼저 가볼게. 미안해.
수 잔.
잔 내가 너무 서둘렀나 봐. (사이) 내가 우리에 대해 너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
수 (힘을 주어) 잔.
잔, 동작을 멈추고 잠시 수를 바라본다. 수, 말을 꺼내지 못한다. 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떠나려 한다.
수 나도 아직 기억해. 전부, 자주. 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아니야.
잔, 수의 말을 듣는다. 잔은 대답하지 않고 카페를 나간다. 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카운터로 간다. 안쪽 소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떠난다. 그 자리를 바라보는 수. 수는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하고 사람들이 막 떠난 소파에 앉아 몸을 파묻는다.
밖으로 나간 잔은 공원으로 가는 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 [단막금 10]은 7월 23일 금요일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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