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공간, 쓰기
스파이시 만다린/두 번째 [공간쓰기] (끝) 2021. 8. 5. 02:01 |
- 마지막 공간 : 글 짓는 공간
두 번째 스파이시 만다린 프로젝트 [공간쓰기]가 마무리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은 공간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첫 번째 공간 서울식물원, 두 번째 공간 이태원 보광동, 세 번째 공간 덕수궁, 그리고 네 번째 공간 부산. 그 공간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순전히 공간을 방문한 이후의 몫이었다.
주제가 정해지는대로 글을 쓰면 되었던 지난 프로젝트와는 달리 이번 프로젝트에서의 가장 핵심은 그 공간을 직접 방문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한 지점에서 출발해 우리가 설정한 공간으로 이동했고, 공간을 산책하고 둘러보고 탐구했고 다시 다른 점으로 옮겨 글을 작성했다. 공간이 주는 첫인상이나 특색뿐만이 아니라, 그 장소로 이동하기까지의 낯선 풍경들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공간을 끄집어내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글에 담겼다.
그리하여 이번 프로젝트의 작업 노트는 각각의 공간을 방문하고 난 뒤 마지막 과정이 이루어지는 장소, 우리가 글을 썼던 공간을 주제로 써 보기로 했다.
<데킬라뮬과 믹스키트가 방문했던 공간과 공간쓰기 리스트>
1. 서울식물원
식물원의 오후, 데킬라뮬 / 에틀린케라 엘라티오르, 믹스키트
2. 이태원 보광동
러브코인, 데킬라뮬 / 0, 믹스키트
3. 덕수궁
이바노비치 세레진 사바친, 데킬라뮬 / 여러 비상구를 열다, 믹스키트
4. 부산
부산의 여름, 데킬라뮬 / 바다 불꽃 금지, 믹스키트
*
<데킬라뮬의 공간>
올해 3월, 이사를 왔다. 서울에 생긴 첫 자취방. 이전까지 지냈던 학년마다 다른 방이 배정되는 기숙사는 딱히 거주지라는 느낌을 주지 못했고, 무언가를 써야 할 때마다 매번 다른 카페와 학교의 빈 공간들을 떠돌아다녔다. 늘 한두 명 이상의 사람과 한 방에 함께 살아야 했음에도 밤이 되면 홀로 어딘가에 고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더 밖으로 나가려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내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기분에서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그 기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내 공간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공간을 홀로 견뎌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 혼자 서 있는 그 공간에서 아늑함과 해방감을 느꼈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정확히는, 꼭 누군가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고, 이 편안한 공간에서 나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록 할 일은 많았지만, 그 안락함이 주는 안정은 그 일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이번 공간쓰기 프로젝트의 글들은 모두 이 공간에서 창작되었다. 대부분은 책상에서 모든 사건이 만들어졌다. 서울의 집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이 공간은 때로 몇 년 전 지냈던 이태원의 낡은 주택이 되기도 하고, 작년에 살았던 비엔나의 집도 되었다가 부산 여행을 하며 묵었던 숙소가 되기도 했다. 그 무수한 공간들이 겹쳐져서인지 이곳에 살게 된지 불과 반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이곳에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낸 듯하다.
이제 예전만큼 집에 홀로 있는 적막한 시간이 두렵지 않다. 불안이나 두려움이 불쑥 고개를 드는 순간에도, 예전만큼 불안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거쳐온 그 무수히 많은 공간들과, 그 공간 안에 존재했던 시간과 사람들 때문인 것 같다. 이번 공간쓰기 프로젝트를 통해 기억에 깊이 남을 공간의 층을 다시 쌓을 수 있어서 기뻤다.
스파이시 만다린의 공간쓰기 프로젝트는 끝이 났지만, 앞으로 또 무수한 가능성의 공간들을 마주할 수 있기에 어떤 면에선 새로운 출발을 하는 느낌이다.
이 기대감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
<믹스키트의 공간>
서울식물원, 이태원 보광동, 덕수궁, 부산
이 네 공간을 다녀온 후
나는 내 집에서, 내 방에서
계속해서 썼다.
에틀린케라 엘라티오르의 불꽃, 강렬한 최초의 순간을,
언덕을 올라, 복잡한 골목을 지나야 갈 수 있던, 이제는 찾을 수 없는, 독립 단편 영화 상영관을,
나의 유일한 비상구, 덕수궁,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함성소리를,
이제는 울지 않는, 아직 나에게 남아있는 부산, 불꽃, 금지,를
이 모든 걸 잃지 않기 위해, 고이 보관하기 위해,
내 집에서, 내 방에서,
숨죽여 썼다.
여기는 내가 방문한 모든 공간이 잠들어있는 집합의 공간
11월이면 나는 이 공간에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 공간에는,
내가, 우리가, 내가 다녀온 모든 공간이,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나의 공간, 내가 지나온 공간,
이제는 안다,
내가 머문 공간에는,
내가 있고,
그때의 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있다는 사실을,
나는 쓴다,
공간을, 공간 속의 나를,
계속해서 쓴다,
- 지금까지 두 번째 스파이시 만다린 프로젝트 [공간쓰기]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세 번째 스파이시 만다린 프로젝트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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