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공간 : 이태원 보광동 

  [0], 믹스키트

 

 

1

 

 

  너는 제멋대로였다. 어떤 식이었냐면 갑자기 나를 영화 속 술집에 데려간다거나, 내 집으로 찾아와 직접 분갈이한 식물을 선물로 준다거나, 드라이브를 하자며 무작정 내 직장 앞으로 찾아온다거나. 이 모든 게 즉흥적이었고 그래서 가끔씩 나를 들뜨게 했지만 너는 제멋대로였다.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 어느 영화에 나오는 술집인지, 어떤 이름을 가진 식물인지, 왜 갑자기 드라이브가 하고 싶어졌는지. (아직까지도 나는 모른다) 너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 넌 왜 이렇게 제멋대로냐고. 도대체 왜 설명을 해주지 않느냐고. 내 의사를 단 한 번만이라도 존중해달라고.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네가 항상 죽고 싶어 했으니까. 매일 밤마다 나에게 전화해 내일은 꼭 죽어버릴 거라는 다짐을 전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오랫동안 다음날이 되어도 죽지 않았어. 죽음 말고 다른 걸 선택했어. 그건 너의 이루지 못한 소망, 네 마음속에 둥둥 떠 있는 남겨진 바람들.

  너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죽기 전에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했던 걸 모두 해치우려는 사람처럼 분주히 움직였어. 넌 매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자, 여행을 마무리하는 사람처럼 보였어. 그 여정에 내가 언제나 함께 있었고. 너는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네 안에 있는 모든 걸 나에게 공유했다. 내 집은 네가 선물한 것들로, 내 머릿속은 너와의 시간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가끔은 네가 정말로 사라질 때까지, 네 속이 텅 빌 때까지 그럴 것 같아 두려웠다. 너의 끝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날이 곧 올 것만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어 너의 제멋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네가 날 찾아와도, 설명 없이 날 이끌어도, 잠들기 전마다 내일은 꼭 죽어버리겠다고 선언해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거다. 못했던 거다.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해도 그러한 날만 계속되기를 바랐다. 네 전부를 나에게 맡기고 진짜 떠나면 꼭 내가 너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네가 영원히 제멋대로이길 바랐다. 

 

 

1+1

 

 

  그날도 마찬가지로 넌 내 직장 1층 입구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나는 오늘도 어디로 가게 될지 상상을 하며 너에게 다가간다. 너는 나의 손을 덥석 잡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극장이야. 라고 말한다. 너는 나를 차에 태우고 어두운 밤거리를 달린다. 너는 또다시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 이상하게 영화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었어. 그럼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극장에 가고 싶은 건가? 그런데 사람이 많은 극장에 가고 싶은 건 또 아니었고, 조용한 극장에 가고 싶었어. 조용하고 작은 극장. 이라고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조용하고 작은 극장. 나는 가본 적 없다고 생각한다. 또 왜 네가 극장에 가고 싶어졌는지 생각한다. 그것도 나와 함께.

  너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극장을 찾았고, 그 안에서 홀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했다. 네가 극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수많은 좌석 중 제일 구석, 맨 오른쪽 맨 뒷자리. 영화를 예매할 때 그 자리가 비어있지 않다면 영화를 보지 않는 선택을 할 정도였다. 숨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자리는 영화가 잘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꼭 동떨어진 섬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 그곳에서 아무 방해도 없이 홀로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은 두렵지만, 혼자라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서,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게 되어서, 딴 사람들을 따라서 웃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고 했다. 너는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그 누구와도 영화를 함께 보러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너는 나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너는 어떠한 마음으로 나를 극장으로 데려가는 걸까.

  우리의 차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그곳은 다름이 아니라 이태원 보광동. 네가 사는 동네다. 극장에 간다고 했는데, 네 마음이 바뀌어 너의 집으로 가고 있다 생각한다. 넌 자주 제멋대로였으니까. 차는 우사단길로 들어선다. 우리의 양옆으로 이슬람 사원, 할랄 음식점, 자그마한 술집과 소품 샵, 가죽공예 작업실, 미용실이 지나간다. 네가 자주 가는 카페도 있다. 너는 그 골목의 끝자락에 있는 시티팝이 흘러나오는 바 앞에 차를 세우고(거기는 너의 집 앞이기도 하다) 이제 걸어가자고 한다. 나는 의아하다. 네가 예전에 여기를 사랑하지만, 극장이 없어 아쉽다는 말을 한 적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묻는다. 이태원에 영화관 없지 않아? 너는 고개를 젓는다.

  너는 자기를 따라오라며 앞선다. 우리는 바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간다. 집 사이사이 좁은 골목을 걷는다. 저녁밥 짓는 냄새와 텔레비전 소리가 들린다. 주황빛 가로등이 있다 없다 해서 우리의 얼굴이 주황빛이 되었다가 어두워졌다가 반복된다.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내 앞 너의 어깨를 잡고는 영화 보러 간다며? 말한다. 너는 응. 맞아. 답한다. 나는 이런 데에 극장이 있을 리 없잖아. 덧붙인다. 너는 고개를 치켜들고 어딘가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남색 대문과 독립 단편영화 상영관이라고 적힌 주택 하나가 있다. 정말 이곳에 극장이 있다니 놀랍다. 너는 자연스럽게 대문을 지나 주택 안으로 들어간다. 로비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공간이 있다. 로비에는 영화 DVD로 꽉 찬 장과 나무로 만들어진 카운터가 있다. 영화관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오늘 볼 수 있는 단편 영화들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한 편당 20분 정도 길이의 단편 영화. 총 다섯 편이 있었고, 너는 다섯 편 다 볼게요. 말한다. 주인은 각 영화의 한 장면이 프린트된 것처럼 보이는 티켓 다섯 장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리고는 로비 옆의 방으로 안내한다. 조용하고 작은 극장. 네가 한 말이 떠오른다. 거기는 깜깜하고 작은 흰색 방. 빨간 등받이 의자가 한 줄당 3개씩 총 2열이 있다. 너는 맨 오른쪽 맨 뒷자리에 앉는다. 나는 맨 왼쪽 맨 뒷자리에 앉는다. 주인이 방을 닫고 나가니 정말 암흑이다. 너에게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영화는 언제 시작하냐고 물으려고 하는 순간 우리의 앞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다섯 명의 감독이 만든 다섯 개의 단편 영화. 다섯 개의 영화에는 모두 너와 같은 사람이 나온다. 다섯 명의 너는 다섯 명의 나를 만나 다섯 개의 장소에 간다. 다섯 명의 너는 각기 다른 곳에 있고,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해있지만, 공통적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죽음을 앞에 둔 다섯 명의 너는 간절히 도망가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결국에는 정말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섯 명의 나는 그러한 너를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태원 보광동, 영화관 의자에 앉아있는, 다섯 명의 나를 바라보는, 나는 울고 있다. 외딴 섬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태원 보광동, 나와 같은 열에 앉아있는 너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게 느껴지는데도 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영화 속에서 다르지만 같은 내가 되어가고 있다. 사라지는 너를 바라보며, 내 안에 남아있는 너를 느끼고 있다. 네가 되어가고 있다. 더는 없는, 앞으로의 네 삶을 살아갈, 너로 변하고 있다.  

 

  깜깜하고 작은 흰색 방에 불이 켜졌을 때*(1+1')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너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우리가 작은 방에서 나왔을 때 내가 발견한 건 독립 단편영화 상영관의 안내문. 

 

  오늘 이곳의 마지막 영업일이다.

 

  우리는 극장에서 빠져나와 다시 집 사이사이를 걷는다. 네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너를 집에 데려다주고 멍하니 네 집 문을 바라본다. 주저앉아서 내가 불현듯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0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네가 나를 찾지 않은 날이었다. 너는 제멋대로였다. 너는 나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는 이태원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쭉 걸었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을 올랐다. 이슬람 사원, 할랄 음식점, 자그마한 술집과 소품 샵, 가죽공예 작업실, 미용실, 카페를 지나 재즈가 흘러나오는 바에 닿는다. 그 바의 맞은편에는 네가 살고 있다. 너의 집 문 앞에서 전화를 거니 안에서 벨소리가 들려온다. 너는 받지 않는다. 문을 두드린다. 네가 나오지 않는다. 네가 극장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를 지나 골목 사이사이로 걷는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너와 함께 갔던 극장이 나오지 않는다. 극장이 있었던 장소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너의 집 앞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바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간다. 너와 걸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다시 극장을 찾는다. 극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측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극장의 흔적은 없다.

 

  분명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너와 극장을 갔었는데, 조용하고 작은 극장, 이태원 보광동의 유일한 극장, 우리 같이 영화도 봤잖아. 다섯 명의 네가 죽어가는 영화를 봤었잖아.

 

  그리고 다시, 너의 집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린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소용돌이처럼.

 

  이태원에 극장이 있었나?

  네가 이태원에 살았던가?

  너와 극장에 간 적이 있었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네가 했던 것처럼. 너처럼. 너는 내 안에 있다. 언젠가부터.

  그런데 마음 중앙이 뻥 뚫린 것 같아. 타원형 모양으로. 바람이 그 구멍으로 지나가는 것 같아. 차갑고 무섭다. 

 

 

*(1+1')  

 

 

  네가 잠들어있었는데, 너를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태원 보광동이었고, 너의 집이었다.

 

 

1

 

 

  누군가 우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었고, 거기는 이태원 보광동 골목 사이에 있는 조용하고 작은 영화관이었고, 

 

  영화 속에서 우리는 저녁에 자동차를 타고 우사단길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고, 어떤 영화관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걸 영화관에서 지켜보는 우리가 있었고, 

 

  우리는 이태원 보광동에 있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 모르고, 

 

  거기가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네가 있었고,

 

 

 

 


  •  두 번째 스파이시 만다린 프로젝트 [공간쓰기]는 한 주 쉬어갑니다. 
  •  세 번째 공간 '덕수궁' 첫 번째 타자는 데킬라뮬입니다. 6월 16일에 업로드됩니다. 
Posted by 믹스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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