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쓰기 9] 몇 개의 나
스파이시 만다린/첫 번째 [이어쓰기] (끝) 2021. 3. 31. 12:55 |
- 아홉 번째 주제 : 처음
[몇 개의 나], 믹스키트
연과 우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지금이 첫 번째가 아닌 거지." 연이 말했다.
하지만 우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연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카페가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는데, 우에게는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우는 온 신경을 연의 두 입술에 집중한 채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추측하려고 했다. 쉽게 되지 않았다.
"뭐라고?" 우가 답답한 마음을 뱉어냈다.
"안 들려? 내가 하는 말이 안 들리냐고." 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빠르게 요동치는 연의 두 입술. 우는 연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울어버릴 것만 같다는 불가해한 확신이 우를 감쌌다. 우는 카페의 문을 가리키며 밖으로 나가자고 소리쳤다. 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
연,
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야.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넌 나를 생각하고 있니?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니? 알 수가 없네.
오늘은 너의 생일이야. 넌 너의 생일에 항상 이렇게 말했지.
만약 내가 죽는 날을 택할 수 있다면, 난 내 생일을 택할래.
정말로 넌 네가 한 말을 지켜냈구나. 말을 지켜낸다는 거 어려운 일인데. 넌 그 어려운 일을 해냈구나. 난 너의 말이 이렇게 빨리 지켜질 줄은 몰랐어.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래서 계속 주저앉게 돼. 너의 장례식에서, (네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널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계속 주저앉아 울게 돼. 그래서 잠시 어디론가 가고 싶었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너의 죽음을 진짜라고, 사실이라고, 굳게 믿게 될 것 같았거든. 내 집 곳곳에 네가 있으니까. 항상 있으니까.
그래서 난 지금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대는 언덕에 있어. 내 뒤에는 높은 산이 있고, 내 아래에는 수많은 집들과 바다가 있어. 뻥 뚫린 곳에 있으니 기분이 좋아. 한 발만 내디디면 꼭 날 수 있을 것만 같아. 내 등 뒤에 날개가 솟을 것만 같고, 그 날개를 가지고 내가 막 바다 위를, 수많은 사람들 머리 위를, 나무가 만개한 숲과 산, 동산 위를 날아다니고 있을 것만 같아.
오늘 널 생각하며 꽤 오래 배회하니 생각보다 내가 집 밖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넌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 자주 날 집 밖으로 끄집어냈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면서 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내가 까먹고 있었던 것 같아. 집 안에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누군가와 마주하는 게 지겨워서, 두려워서, 무서워서. 홀로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일기를 쓰고, 드라마를 보고, 향을 피우고. 그런 것들을 하다 보면 바깥의 일 같은 건 잊을 수 있으니까, 삭제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난 집 안을 좋아했던 것 같아. 하지만 뻥 뚫린 곳에서 나에게 안녕하냐고 물었더니 안녕하다고 하더라. 생각보다 난 지금 안녕하고, 바깥을 애정하고, 인간을 그래도 애정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 너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어. 넌 항상 나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산책에 관해, 나무에 관해, 구름과 빛, 그 구름들의 그림자에 관해, 무지개에 관해, 비와 비 온 뒤의 풍경에 관해, 언덕 위의 공기에 관해, 언덕 위에 도달했을 때의 순간에 관해, 강가의 냄새에 관해, 강가의 물고기들에 관해, 숲과 숲의 소리에 관해, 나뭇잎의 마음에 관해 보여주고 들려주곤 했으니까. 그것도 자주, 나를 위해 해주었으니까. 바깥을 두려워하지 않게 도와주었으니까. 내가 집 안에 있어도 바깥을 미워하지 않게 된 건 다 네가 준 희망과 용기 때문이야. 바깥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어떠한 소리 냄새가 있다는 걸 계속 말해주었으니까, 상기시켜주었으니까, 내가 안녕할 수 있는 거야.
요즘 종종 너와 강릉에 갔을 때를 떠올렸어. 그때의 기억은 언젠가 한 번씩 꼭 찾아오곤 하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요즘 계속해서 강릉 바다의 소리, 모래의 촉감, 어두운 바다 앞에서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계속 들리고 보이고 만져졌어. 내가 꼭 그때의 내가 된 것만 같았지. 거기에 다시 도달한 것만 같았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그때로? 언제나 내가 그 순간에만 있으면 좋겠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어쩌면 우리 둘만 있었던 바다 앞에서 영원히 있으면 좋겠어. 너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다시 강릉에 가자고. 우리 둘의 시간으로, 그 영원처럼 느껴지던 순간으로 다시 가자고.
네가 없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 며칠 전에 넌 나에게 사랑한다고 했지. 그리고 내가 너에게 큰 무언가라고 했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낼 수 있었던 건, 내가 나중까지 살아낼 수 있는 건 네가 있었기, 있기 때문일 거야. 네가 없었다면, 네가 없다면, 난 어떠한 언덕에 가도 새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을, 무섭고 차가운 바다에 평생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바깥에서 오랫동안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
넌 나에게 있어. 사라진 게 아니라, 여기에, 어쩌면 우리의 시간 안에 있다고 생각해.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올해도 너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 다행이야.
우
우에게 보내는 편지
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니. 내 몸 어딘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된 불이 날 태우고 새까만, 형체를 잃은 재로 만들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소리를 들을 적 있니. 나는 종종 그 소리를 들어. 내가 불타도록 있는 힘껏 몸짓을 보이는 불꽃의 음성을. 그럴 때면 다행이다, 라는 마음과 끔찍하다, 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어. 정말 무언가도 아닌 재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게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바라기도 해.
언젠가부터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내 우울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어. 잠깐 그 마음은 몸을 숨기고 나를 속이고 있었어. 마치 놀리는 것만 같이, 하염없이. 나에 대한 조롱, 기만과 같은 것들, 우리의 세계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날 괴롭혔어. 불꽃이 되어서, 나를 태우려고 몸을 이리저리 굴렸지.
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타닥타닥 소멸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조금은 웃기기도 해. 그래, 태워보아라, 어디까지 타들어 가는지 지켜보겠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 그들은 내가 하는 생각들을 듣기나 할까. 만약 듣는다면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나와 그들의 언어는 다를 텐데. 막을 수는 없겠지. 막을 용기도 의지도 타들어 가니까.
난 그들의 온도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어. 파란 쪽이 더 뜨거운지 붉은 쪽이 더 뜨거운지도 가늠할 수 없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지. 그들의 존재, 뜨거움, 위력, 온도 그 모든 것을. 그 안에 손을 집어 넣지 않아도, 겪지 않아도. 어쩌면 겪었을 수도 있겠다. 사라진 기억 안에 그 감각들이 남아있을지도 몰라.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내가 그 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의 살아있음을 알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난, 정말 나는 지금과 다를까. 그 삶의, 살아가려는, 격정적으로 생존하려는 사실만이라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결국에 재가 되는 거라면 지금 깨닫는 게 나은 쪽이라 생각해. 너에게도 그런 음성이 있겠지? 나에겐 타들어 가는 것과 같은 소리라면 너에겐 무엇이니. 무엇이 들리니. 그들도 시끄럽고 때론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격렬하니?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 소음 속에서 난 아직 살아있어. 너와 함께 그 소리를 들으며.
우와 연
우는 카페 사장에게 가 음악 소리를 줄여달라고 부탁한다.
우 음악 소리 좀 줄여주실 수 있나요?
카페의 음악 소리가 줄어든다.
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연이 울고 있다.
우 괜찮아? 내가 네 얘기를 안 들어서 그런 거야? 안 들은 게 아니라 카페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정말 들리지 않았어.
연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눈물이 나네?
우 괜찮아? 정말?
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우 네가 하던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줄 수 있어?
연 별 이야기 아니야.
우 내가 너무 궁금해서 그래. 카페 음악 소리도 줄여달라고 부탁했는데?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연 고마워.
우 뭐가?
연 아니. 그냥.
우 그러니까 다시 한번만 말해줘.
연은 조금 전 하던 말을 다시 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지금이 첫 번째가 아닌 거지. 우리는 지금 몇 번의 삶을 살아낸 후인 거지. 내가 열 번째의 나일 수도 있는 거지. 계속해서 이 지겨운 순간을 반복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내가 죽음을 택해도 열한 번째의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니까. 열한 번째의 나와 (사이) 한 스무 번째의 너와 다시 만나서 이 시끄러운 카페로 오게 되는 거야. 그리고 다시 내가 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너에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은 거야. 괜찮을 거지? 이미 난 아홉 번의 죽음을 맞이했을걸? 열 개의 너를 만났을걸? 열 번동안이나 난 너와 친구였을 거야.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난 계속 몇 번의 내가 되어도 너를 만나고 있을 거야. 아마도 그럴 거야.
우가 울고 있다.
카페의 음악 소리가 다시 커진다.
- 마지막 주제는 [반복]
- 데킬라뮬은 [반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마지막 글을 씁니다.
'스파이시 만다린 > 첫 번째 [이어쓰기] (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작업 노트] 이어서 계속 (0) | 2021.04.14 |
---|---|
[이어쓰기 10] 소우주 (0) | 2021.04.07 |
[이어쓰기 8] 한여름 밤의 꿈 (0) | 2021.03.24 |
[이어쓰기 7] 꿈속 골목길 꿈속 (0) | 2021.03.17 |
[이어쓰기 6] 동네 친구 (0) | 2021.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