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주제 : 해 질 녘  


  [해 질 녘, 에서], 믹스키트

 

 

  해 질 녘에서

 

 

  해가 지고 있다. 서늘한 공기가 불어온다. 외투를 가져오지 않아 속상하다. 두 손으로 두 팔뚝을 문지른다. 내가 나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의 왼쪽 하늘은 자줏빛으로 물들고, 오른쪽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든다. 구름의 색도 하늘의 색으로 물든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겁이 난다. 주위를 유심히 둘러본다. 왼쪽 하늘과 오른쪽 하늘의 색이 점점 섞이기 시작한다. 아, 하고 탄식을 내뱉는다.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천천히 어두워진다. 여기를 비추는 태양이 점점 몸을 숨긴다. 잃어버린 순간들이 나타난다. 떠나간 친구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고개를 다리 사이로 파묻는다. 눈물이 터지려고 한다.

 

 

  공터에서 

 

 

  텅 비어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다. 두 손에는 여러 식자재와 간식으로 꽉 찬 분홍색 종량제 봉투가 들려있다. 손가락이 저려온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뻥 뚫린 공터를 발견하게 되어 그러지 않기로 한다. 집 근처에 이렇게 큰 공터가 있었다니.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게 되어 들뜬다. 잠시 머물렀다 가기로 한다. 

  공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만 바닥에 깔려있다. 주차장인가? 잠시 생각하지만, 바닥에 주차 라인이 그려져 있지 않아 금방 아니라고 단정한다. 공터 중앙으로 향해 들고 있는 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곧 저녁이 올 것이다. 난 조금 걷고 싶어져 넓은 공터를 규칙 없이 걷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와 발소리만 공터에 있다. 터벅터벅 걷다 장을 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내가 대견해진다. 며칠 만에 바깥에 나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꽤 오랜 기간이었다. 어느새 머리도 많이 자라 바람에 휘날릴 정도다. 내가 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는지 신중하게 떠올려본다. 무엇 때문이었지? 분명 어떤 일이 나에게 벌어진 게 확실한데, 그 일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용기를 내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과 마트에서 먹고 싶은 것을 샀다는 사실과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 공터를 발견하고, 산책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해진다. 의욕이 다시 생겨난 것 같아 기뻐진다.

  꼬르륵 소리가 배에서 들려온다. 산책을 멈추고 공터 중앙으로 향해 종량제 봉투를 뒤적거린다. 조금 전 산 초코바를 꺼내 들고 그 자리에 앉아 까먹기 시작한다. 달콤한 초콜릿의 맛과 고소한 견과류의 맛이 뒤섞인다. 저녁에 어떤 요리를 해 먹을지 고민한다. 카레라이스나 오무라이스를 해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바닷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어. 여기 바람은 네가 있는 곳보다 더 차가워. (아마 그럴 거야. 너와 함께 이때쯤, 해가 질 때쯤, 지금과 비슷한 계절쯤, 네가 사는 동네를 산책한 적 있었잖아. 그 공기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거든. 그땐 너와 같이 있어서 포근했던 걸까? 잘 모르겠어) 뺨은 시리지만 바닷내음을 맡으며 자전거 타기를 멈출 수는 없어. 넌 내가 이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 너와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거였으니까. 넌 나에게 이사 가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지. 잘못한 게 없으면서 다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난 바다가 있는 동네에서 살고 싶었어. 바다를 내 곁에 두고 싶었거든. 바다를 보면 마음이 뻥 뚫리잖아. 앞에 놓일 모든 순간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잖아. 이사를 오기 전 난 많이 두려운 상태였어. 내가 전부 포기해버릴 것만 같아서. 내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아서. 아무런 이유 없이 눈물이 날 때가 많았거든. 거리를 걷다가, 쌀을 씻다가, 샤워를 하다가, 눈을 감고 노래를 듣다가, 화분에 물을 주다가, 청소를 하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어. 언제는 버스를 탈 때 눈물이 나기 시작해서 내리고 나서까지 멈추지 않은 적도 있었어. 내가 왜 이렇지? 왜 이렇게 눈물이 계속 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어. 너무 답답했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없었어. 뭘하든 계속 눈물이 나니까. 혼자 있을 때에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밖에선 더 어려웠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거든. 계속 울고 있으니까.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울어버리는 건 나에게도 버거운 일이었어.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내가, 나 자신 하나 다룰 수 없는 내가 너무 답답했어. 떠나야 했어. 바다 옆으로 가야만 했어. 너에게 나의 이런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았거든. 네 앞에서 갑자기 울고 싶지 않았거든.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넌 이렇게 말하겠지. 내 앞에서는 울어도 돼. 내가 밖에서 꼭 같이 있을게. 널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칠게. 언제나 넌 내 편이 되어주었으니까. 너보다 바다가 좋아 여기로 온 게 아니야. 날 다시 조립하기 위해 바다로 온 거야. 차근차근 날 조립해 다시 울고 싶은 날에만 울음을 터트리는 내가 되어서 돌아갈게.

  바다가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어. 자전거를 타며 그 변화를 바라보고 있어. 바람이 눈을 찔러서인지, 네가 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또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난 해 질 녘 바닷가에 있어. 너와는 조금 다른 바람을 맞으며 함께 있어.

 

 

방안에서

 

 

  귤껍질을 까고 있습니다. 창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방안이 온통 귤색입니다. 해 질 녘의 향기는 지금 이 방을 꽉 채운 귤의 향과 비슷할까요?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하루의 끝은 해가 질 때쯤일까, 해가 지고 깜깜해졌을 때쯤일까, 자정이 될 때쯤일까? 전 그때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자신에게 하루의 끝은 해가 질 때쯤이라고 했습니다. 긴 시간 방안에서 머물다 오랫만에 방 밖으로 나갔을 때 그걸 깨닫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친구는 그날 아주 오랜 칩거 생활을 끝내고 장을 보러 나갔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나가고 싶어졌다고 하더군요. 마트에 도착했을 때 조금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마트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구는 용기를 가지고 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먹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쓸어 담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많은 종류와 양이었다고 했습니다. 두 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요. 친구는 그걸 들고 집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공터를 발견했습니다. 텅 빈 공터를요. 그때 해가 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는 하늘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오늘도 살아 내버렸네.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는 공터에서 초코바를 먹었는데 너무나 달콤하고 고소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집에 왔을 때 그 초코바를 두 손 가득 사 왔고요. 전 친구의 말을 들으며 초코바를 먹었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방안이 귤색으로 꽉 차고 있었습니다.

  다 깐 귤을 작은 덩어리로 잘라 한 입 먹어봅니다. 입안이 온통 귤색으로 변합니다. 곧 지나갈 겨울과 멀리 떠난 친구를 떠올립니다. 아, 오늘은 친구에게서 편지가 온 날입니다.

 

 

해 질 녘, 에서

 

 

  색이 변하는 하늘 앞에서 인사를 합니다.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합니다. 인사를 받은 사람은 또 어디의 해 질 녘, 에서 저에게 답인사를 보냅니다. 손을 크게 흔들고 안녕, 크게 외쳐봅니다. 안녕, 하루의 끝에서 이렇게 인사를 보내. 안녕, 거기는 안녕하니, 안녕, 너는 안녕하니, 안녕, 당신은 안녕합니까, 안녕,

 

  해가 지고 있습니다. 서늘한 공기가 불어옵니다. 외투를 가져오지 않아 속상합니다. 두 팔로 어딘가에 있는 당신을 껴안습니다. 나와 당신이 해 질 녘, 에서 포옹하고 있습니다. 

 


  •  다음 주제 : 포옹 

  •  데킬라뮬은 [포옹]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Posted by 믹스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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