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쓰기 2] 도망치는 골목에서
스파이시 만다린/첫 번째 [이어쓰기] (끝) 2021. 2. 4. 2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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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주제 : 도망자
[도망치는 골목에서], 데킬라뮬
온다.
바닥에 내려둔 발을 소파 위로 올려 둥글게 감싸 안는다. 창으로 넘어오는 쓰레기장의 소음도, 자주 짖던 윗집 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구름 흘러가는 걸 본다. 파랗고 하얀 하늘에만 집중하려 하지만, 눈은 자주 흘깃 검은 핸드폰 화면으로 향한다. 잘 잤어? 라고 보낸 문자에는 아직 답장이 오지 않았겠지. 십 분도 채 되기 전에 텅 비어있는 메세지함을 확인했으니 굳이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볼이 축축하다는 걸 느끼고 나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게 멈춰버린 도시에선 내가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도, 내가 찾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시간도 공간도 내 주위에서는 흐르지 않는다.
나는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걸 알았다. 해가 지기까진 아직 두 시간이 남았다.
신경 써서 옷을 고를 여력은 없다. 오래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 최대한 따뜻하게 껴 입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파트 복도 깊숙이 낮게 깔린 해가 들어온다. 복도 전체가 밝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눈꺼풀 위로 빛이 일렁인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눈물로 덮였던 얼굴이 시원하다. 자주 가지 않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눈에 익지 않은 동네의 모습들이 나온다. 이 길목에 작은 슈퍼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희미하게 불이 켜진 슈퍼를 지나 강가로 가는 길을 찾는다.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마 그것으로부터 안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보이는 건 겨울의 헐벗은 나무뿐이라 할지라도.
슈퍼를 지나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육교와 그 너머의 강물이 보인다. 높고 좁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난간에 붙어 있는 홍보 스티커들을 읽는다. 현란한 색깔들 사이로, 흰색 바탕에 검정 글씨가 전부인 글 하나가 눈에 띈다. 길바닥 시, 라고 젹혀있는 문구 아래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적혀 있다. 외국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뚤배뚤한 글씨가 조금 성나보인다. 육교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저 아래 누가 올라오려는 게 보인다. 다시 올라가야 하나, 잠깐 뒤를 돌아보는데, 올라오려던 사람이 계단을 도로 내려가 한 쪽으로 이미 비켜서 있다. 속도를 내 계단을 내려와 눈짓으로 인사를 건넨다. 상대가 가벼운 끄덕임과 함께 미소를 짓는다. 몇 발자국 더 걸어간 아까 그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저 사람도 길바닥 시 스티커를 발견할까 궁금해진다.
강가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오랜 걸음마다 한 번씩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누군가는 런닝화를 신은 발로 지나쳐간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부서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인다. 타인이라는 존재의 감각. 주머니 속 내내 붙잡고 있던 핸드폰에서 손을 떼고 밖으로 손을 꺼내 놓았다. 손가락이 바람결을 흝는다. 인적이 드물어진 곳에 푸른 칠이 약간 벗겨진 배가 말뚝에 밧줄로 묶여 있다. 밧줄이 이리저리 설켜 마치 연못처럼 가둬진 물 위에는 새 한 마리가 앉아 깃털을 가다듬고 있다. 새는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부리짓에만 열중한다. 구석구석을 열심히 손 본 다음엔 유유히 물 위를 떠 다니다가, 낮은 높이로 날아 배 너머의 강물 위에 내려앉는다. 그곳에 무언가가 있어서, 라기보단 그냥 그곳으로 가고 싶어졌던 거라고 생각한다.
벤치에 앉았다. 점점 해가 떨어지고 있어 공기가 더 차가워진 게 느껴진다. 옷을 따뜻히 입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멈춰 있는 듯 보였던 구름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걸 이제야 본다. 하얗던 구름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주황빛을 띤다. 하늘이 땅과 맞닿은 곳부터 조금씩 짙게 물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킨다. 왔던 길로 돌아가기로 한다.
불이 희미하게 켜져 있던 그 슈퍼에 들른다. 아까 전보다 조명이 더 밝아진 것 같다. 날이 조금 더 어둑해졌기 때문일까. 양파망을 집어들고 계산대에 선다. 계산대 옆에 조그마한 화분들이 진열된 것을 발견한다. 하얀색 꽃잎 사이로 노란 동그라미들이 박혀 있는. 작은 화분을 집어 계산대에 함께 올려놓는다.
양 손에 짐을 들고 있어 현관문을 열기가 조금 버겁다. 그래도 화분을 떨어트리지 않고 집에 들어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양파는 주방 조리대 위에 놓아두고 곧바로 창가로 간다. 창가 책상에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화분을 두려고 하다가, 화분 받침이 없다는 걸 알았다. 부엌 찬장을 뒤져 얕은 접시를 찾는다. 상 위에 잘 내놓지 않았던 접시를 책상 위에 두고 그 위에 화분을 내려놓는다. 화분 한 귀퉁이에 얼마나 자주 물을 주어야 하는지 적혀있는 작은 깃발이 꽂혀 있다. 빈 페트병에 물을 담아 흙 위에 조금씩 뿌려준다.
겉옷을 옷장으로 집어넣는다. 따돌리는 데에 성공하고 찾아온 안정. 오지 않는 답장을 떠올려도, 내일이 다시 온다는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언제 다시 따라붙을 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때까진 그럭저럭 지내보기로 한다. 언제가 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렇게 평생을 도망다녀야 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은, 잠시 떠올리지 않기로 한다. 사 온 양파를 볶아 카레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우선은 그 생각만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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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제 : 해 질 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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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키트는 [해 질 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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