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쓰기 1]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
스파이시 만다린/첫 번째 [이어쓰기] (끝) 2021. 1. 27. 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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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주제 : 스파이시 만다린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 믹스키트
네가 보내준 편지는 잘 읽었어. 너는 궁금하겠지. 내가 어떻게 편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나 역시 너무나도 궁금했어. 어떻게 네가 나를 찾게 되었는지, 어떻게 네 편지가 내 손에 쥐어지게 됐는지. 어쩌면 날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온 게 아니었잖아. 네 편지가 온 거지. 편지 봉투에는 제대로 된 주소가 적혀 있지도 않았어.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과 내 이름만 적혀 있었지. 넌 여러 곳에 편지를 보냈지? 아마 그랬을 거야. 내 이름은 흔하지 않으니까. (아직 나도 내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 없어.) 넌 내 이름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 편지가 나에게로 향할 거라 확신했을 거야. 내 이름만 적어 여러 마을로 편지를 발송했겠지. 네가 같은 편지를 몇십 통이나 적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 (그 모든 편지의 내용이 다 같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지금도 넌 편지를 쓰고 있니? 언젠가 내가 받을 순간을 떠올리면서?
넌 여기,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에 편지 보내기를 망설였지?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은 우리가 함께 살았던 곳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멀지도 않으니까. 내가 여기에 있을 거라 쉽게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하지만 너의 편지는 이렇게 왔어. 여기,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에. 만약 여기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 편지가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나도 만나보지 못한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이 편지가 갔겠지. 그 사람이 이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 그 사람은 가장 먼저 왜 이 편지 봉투에는 제대로 된 주소가 적혀 있지 않지? 생각할 거야. 그리고 네가 쓴 편지를 읽어보며 편지의 수신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그 사람에게는 너와 같은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나에게 네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너를 떠나왔는걸.
우체부가 집으로 찾아와 편지가 왔다고 했을 때, 너의 편지를 직접 확인했을 때, 이게 당신에게 온 게 맞나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맞다고 말할지 말지 고민했을 때, 결국 이 편지의 수신인이 내가 맞다고 답했을 때, 우체부의 명부에 서명했을 때 난 수차례 두려웠어. 내가 어디에 있든 너의 흔적이 내 몸 곳곳에 끈질기게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두려웠어. 그래서 우체부가 떠난 후에도 한참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 지나가던 앞집 이웃이 나에게로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였어. 아뇨. 라고 대답했던 것 같아. 아뇨. 괜찮지 않아요. 정말로 괜찮지 않습니다. 앞집 이웃은 자기 집에서 따뜻한 스파이시 만다린 차를 마시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어.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뭔가에 홀린 듯 앞집으로 향했지. 그런데 말이야, 앞집으로 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는 기억이 나지 않아. 눈을 떴을 때 난 내 침대 위에 있었거든. 내가 스파이시 만다린 차를 마시기는 했을까?
전부 거짓 같았어. 네 편지가 왔나? 네가 보낸 편지를 받기는 했나? 끝이 없는 의문이 머릿속에 꽉 찼어. 침대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에 너의 편지가 있었어. 부엌 식탁 위에. 스파이시 만다린이 담긴 바구니 옆에.
에게,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으로.
어떤 말로 이 편지를 시작해야 할지 정말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걸 당신에게 보내도 되는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보잘것없는 말이 편지의 시작이 되었고, 당신에게 이 편지를 부쳐야겠다 결심했습니다.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이 편지가 길을 잃지 않고 당신에게로 향하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제대로 편지가 도착했겠군요. 그건 그 어떤 것보다도 기쁜 일일 겁니다.
(중략)
어느 날 새벽 당신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고,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어찌할지 몰랐고, 당신을 안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죠. '악몽을 꾼 것 같아. 계속.' 저는 악몽을 꿨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계속이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울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제가 안기를 그만두고 바깥으로 나간 후에야 울음을 그쳤습니다.
당신의 계속되는 악몽은 무엇이었나요?
오랫동안 고민하다 제가 지금 내린 결론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당신에게 계속되는 악몽은 바로 저였지요? 당신이 떠난 후 '계속'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예측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저였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살게 된 때부터 어딘가 많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제가 계속 당신을 괴롭혀 왔기 때문이겠지요.
지금도 그러한가요? 제가 여전히 당신의 악몽인가요? 어떻게 그 악몽에서 깰 수 있을까요? 저는 간절히 알고 싶습니다.
(중략)
그럼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너무나도 긴 편지였군요. 전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이 악몽에서 깰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가 닿길 바라며. 잘 지내고 있다는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잘 지내고 있지 않아도 답장을 보내주세요. 당신이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지만요.)
네가 보낸 편지를 읽고 내 머리를 채운 건 악몽이라는 단어였어. 악몽. 악몽. 악몽. 그렇지. 나에게 악몽은 너였지. 너와 처음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난 정말 기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산다는 거,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어느 때고 함께 한다는 거, 내가 바라오던 거였거든. 그런데 많은 게 처음과는 달라졌어. 긴 시간 너와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너에게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왜 저럴까? 왜 저런 행동을 하지? 왜 저런 말을 하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점점 커졌어. 나와 다른 네가, 나와 같지 않은 네가 끔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지. 네가 싫어졌어. 하지만 가장 큰 악몽은 네가 아니었어. 나의 악몽은 나였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나의 모습, 나의 생각, 내가 널 바라보며 느끼는 모든 것.
너와 같이 사는 집에서 도망치고 싶다 생각했어. 널 볼 때마다 너를 미워하는 나의 모습이 보였거든. 그 모습이 내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것 같았거든. 난 네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집 밖으로 나갔고, 한참을 마을을 돌아다니다 네가 잠들 때쯤 집에 들어가기도 했어. 널 더 미워하고 싶지 않았어. 널 사랑하는 마음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커지길 바라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편지에서 언급한 그 날, 난 악몽을 꿨어. 꿈속에서도 나는 너를 미워하고 있었어. 넌 절벽 끝에 있었는데, 난 달려가 너를 밀어버렸지. 넌 저 멀리 떨어졌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절벽 아래에 있는 건 네가 아니었어. 나였어. 나.
더는 숨길 수 없었어. 더는 널 피할 수 없었어.
나의 악몽은 나였어.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는 나. 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나. 악몽에서 깨고 네가 날 안아줬을 때 순간 무서워졌어. 내가 정말로 널 죽여버리면 어떡하지? 널 미워하는 내 모습을 너에게 들키면 어떡하지? 그래서 네가 날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널 영영 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도망가야 했어. 나에게서, 나의 악몽에게서. 악몽을 꾼 날 이후로 너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거든.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나의 얼굴, 나의 표정이 보였거든. 날 계속해서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내가 보였거든. 쿵 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반복해서 들려왔거든. 쿵, 쿵, 쿵, 쿵, 쿵.
그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오다 보니 난 여기, 스파이시 만다린 타운에 있어. 너에게서 그리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어.
넌 스파이시 만다린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매운맛 귤이라니. 상상할 수 없지? 편지를 보내면서도 스파이시 만다린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궁금했겠다. 어쩌면 스파이시 만다린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기로 편지를 보낸 걸 수도 있겠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잖아.
난 어디로 도망갈지 고민하다 스파이시 만다린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기로 왔어. 나에게 필요한 이름 같았거든. 어울리지 않는 두 개가 섞여 있잖아. 스파이시, 만다린.
이 마을에는 스파이시 만다린이 자라. 스파이시 만다린 나무가 엄청나게 많아. 그 나무들과 거기에 매달린 스파이시 만다린을 보며 널 생각해. 그리고 날 생각해. 넌 어느 쪽을 할래? 스파이시를 맡을래, 만다린을 맡을래?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꼭 돌아갈게. 도망을 얼른 끝내고 너에게로 다시 갈게. 너의 흔적을, 아니, 너의 흔적이 아니지. 너에게 붙어있는 나의 흔적, 쉽게 누구를 미워하는 나의 흔적을 떨쳐버리고 너에게로 다시 갈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나를 재빨리 붙잡고 너를 만나러 갈게.
너와 함께 스파이시 만다린 차를 마시고 싶어. 나에게 편지를 보내주어 고마워. 다음에 네가 악몽을 꿀 땐 내가 꼭 안아줄게.
추신 : 너에게 스파이시 만다린을 조금 보내. 우리 집 앞마당에 자라는 나무에서 내가 직접 딴 거야. 네가 좋아하면 좋겠다. 매콤 상큼한 스파이시 만다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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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제 : 도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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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킬라뮬은 [도망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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