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요리] 마라탕과 마라샹궈
스파이시 바나나/[오늘의 레시피] 데킬라뮬 (끝) 2021. 5. 15. 21:02 |
마라를 처음 먹었던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건 마라탕은 아니고 훠궈의 홍탕이었지만. 뜨거운 국물을 정신 못 차리고 마시다가 입 안을 데여 일주일 간 고생을 했다. 열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넋을 빼가는 얼얼한 맛을 잊지 못해 혓바닥과 입천장이 다 나으면 서둘러 훠궈집으로 다시 달려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훠궈는 먹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그때 재료를 데치고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다소 번거로운 점도 있다. 그러니 훠궈 홍탕의 매력적인 맛은 그대로이면서 육수가 끌어오를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한 그릇으로 원하는 재료들이 모두 담겨 나오는 마라탕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매력이 얼마나 강렬했을지 상상해보라!
처음으로 마라탕을 먹은 건 상해의 한 식당에서였다. 상해에서 다녔던 식당들은 대부분 인테리어랄 게 딱히 없는 동네 김밥천국 느낌의 식당이었는데, 그 식당은 상당히 세련된 인테리어에-분위기 있고 은은한 조명, 널찍한 식탁 간 간격, 따뜻한 톤의 나무 탁자와 의자들, 아기자기하고 예쁜 소품들 등- 잔잔한 흘러나오는 분위기를 가진, 여태 다녔던 식당들과는 달랐다. 입구 쪽에는 야채들과 면 들이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마라탕 열풍이 불기 전이라 나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방식의 주문법이었다. 다행히 직원 중 한 명이 영어를 할 줄 알아 여차저차 재료들을 담고 주문을 완료했다. 우리가 바구니 하나에 재료들을 담았기에 한 그릇의 마라탕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훠궈의 새빨간 국물과는 달리 뽀얀 국물이었다. 잠깐의 실망도 잠시,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정신없이 한 그릇을 비우고 한 그릇 더 주문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부터 마라탕 집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반가웠다. 집에서 가까운 마라탕 집은 가격이 그리 비싸지도 않아 자주 사 먹었는데, 외국에서 지내는 동안이 문제였다. 훠궈는 핫팟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식당들에서 팔고 있었지만 마라탕이나 마라샹궈는 도무지 파는 가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만들 수밖에. 마라탕이나 샹궈를 한 번 만들 때마다 온 주방에 마라 냄새가 진동을 해 다른 방에 사는 룸메이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인생에 활기를 주는 마라를 포기할 순 없었다. (한 명은 중국계, 한 명은 몽골 사람이라 그런지 음식 냄새로 인한 불만을 들은 적은 없었다.)
마라 소스나 들어가는 재료를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스나 건두부, 숙주, 청경채, 얇게 썬 냉동고기, 면 등은 중국 식자재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야채 등은 동네 슈퍼에서 사면 되었으니까. 넓적 당면을 구하는 게 의외의 난관이었다. 중국 식자재 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참을 발견 못해 여러 슈퍼를 전전하다가 끝끝내 찾지 못했다.
어떤 소스를 넣는 게 좋을 지 몰라 한 번 살때마다 여러 종류를 구입했는데, 개인적으로는 하이디라오 소스가 제일 별로였다. 엄청나게 맵기만 하고 깊은 맛은 딱히 안 났다. 다른 훠궈 소스로 마라샹궈를 만들어 먹고 그 다음 하이디라오 소스로 마라탕을 만들어먹었는데, 애인도 전에 먹었던 소스가 훨씬 맛있다며 하이디라오 마라탕을 먹는 것은 포기했다. (핫팟에 단련되어 있다며 나름의 맵부심이 있는 친구인데 그때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먹으면 무조건 화장실에서 사망할 거라면서.)
개인적으로는 주황색 포장지의 소스가 맛있었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 한참을 구글링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 그 소스로 집에서 훠궈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으니 상당히 오래된 브랜드인 것 같다. 이금기 마라 소스도 나름 괜찮다. 요즘 집에서 마라를 만들 때는 거의 항상 이금기 마라 소스로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거의 모든 마트에서 팔고 있어 구하기 쉽다는 게 장점이다.
마라 소스와 재료만 준비하면 마라탕 만들기는 굉장히 쉽다. 아마 양조절이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육수는 그냥 물에 소스만 풀어도 되는데 너무 심심하다면 사골 국물이나 치킨 스톡, 혹은 쌀국수 스톡 등을 풀어주어도 된다. 쌀국수 스톡은 한 친구가 추천해준 방법인데, 마라탕의 매콤함과 쌀국수의 은은한 향을 함께 느낄 수 있어 나름 매력적이다. 들어가는 재료는 개인 취향이지만 배추, 청경채, 버섯(팽이버섯,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양송이버섯, 목이버섯 등등), 숙주 이 네가지는 가급적 있는 게 좋다. 그 외에도 넣을 수 있는 건 감자, 연근, 얇게 썬 고기(불고기 용 혹은 샤브샤브용), 면(라면사리, 도삭면, 당면, 옥수수면 등), 푸주, 두부, 건두부피, 브로콜리, 새우 등등이 있다. 씻어야 하는 재료들은 깨끗히 헹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소스를 풀어 끓인 육수에 넣어주면 끝! 넣는 순서는 감자같이 익는 데 오래 걸리는 재료들부터 시작하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육수에 푹 담겨셔 흐물흐물해진 야채를 좋아해 배추는 비교적 빨리 넣는 편이다. 단, 숙주나 청경채는 물에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크기가 매우 줄어드니 가급적 나중에 넣기로 하자. 면은 어떤 면을 쓰는지에 따라 준비 과정이 달라진다. 라면사리나 도삭면은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넣어주면 되는데 이 면들은 물을 많이 흡수하고 육수를 짜게 만드니 넣기 전 이 점을 유의하면 된다. 넓적 당면을 넣는다면 미리 다른 물을 올려 삶기를 추천한다. 옥수수면 역시. 당면같은 경우는 완전히 익을 때까지 삶고 육수에 넣은 뒤 한 번 더 끌여주는 게 좋다. 처음부터 육수에 넣고 익히려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마라샹궈는 만들기는 비슷하게 쉽지만 볶아야 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귀찮다. 처음에는 파를 잘게 다져 기름을 살짝 두른 깊은 팬에 볶아준다. 그리고 제일 먼저 넣을 것은 역시나 익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재료. 감자나 버섯 등을 먼저 넣고 그 다음에 고기와 배추, 마지막으로 청경채나 숙주 같은 재료들을 볶아준다. 소스는 초반에 넣어주면 된다. 중간에 약불로 해놓고 뚜껑을 덮어주면 살짝 물이 생기는데 그렇게 하면 면을 넣고 볶기가 수월해진다. 샹궈를 만들 때는 어떤 면을 사용하던 따로 물을 끓여 익혀주는 것이 좋다. 거의 다 익힌 면을 가장 마지막 단계에 넣어주고 소스와 다른 재료들과 다 섞어주면 끝. 개인적으로 집에서 만들 때는 마라탕보단 샹궈를 만드는 게 실패 확률이 낮은 것 같다.
만들기도 간단하고 갖고 있는 팬의 크기에 따라 만드는 양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집에서 만들기에 최적화된 요리가 아닌가 싶다. 재료들도 한 번 사 놓으면 그걸 응용해 만들 수 있는 다른 요리들도 많고, 아님 한 번은 마라탕, 한 번은 마라샹궈, 이렇게 마라 주간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더, 마라탕이나 특히 샹궈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면 미리 맥주를 냉장고에 쟁여놓는 것을 잊지 말자.
- 다음주는 데킬라뮬의 개인 사정으로 한 주 쉬어갑니다.
- 다음 [오늘의 레시피]는 5월 29일 토요일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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