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착도감 11] 식물도감
스파이시 바나나/[포착도감] 믹스키트 (끝) 2021. 5. 24. 17:48 |
식물도감 베끼기
여기에는 식물이 잘 자라지 않았으므로
식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녔지
여기 사람들은 식물을 보고 싶었으므로
주말마다 낙하산을 타고 외딴 숲으로 향했지
나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게 두려웠으므로
식물을 싫어하는 척했지
매일 밤 숨어서 식물도감을 베껴 그렸다
새 색연필을 사기 위해 문구점에 간 날
내 스케치북은 발견됐다
집에 도착했을 때
같이 사는 친구는 내 스케치북의 그림을 보여주며
숲으로 가자,
이걸 실제로 보는 거야,
설득했다
숨겨진 다른 스케치북의 개수와 절벽에 오른 날들을 모르면서
더는 몰래 그릴 수 없었으므로
함께 절벽으로 향했다
머릿속에서 식물들이 빠르게 자라났다
절벽 위에선 숲이 보이고
그 방향으로 친구는 뛰어내리고
나는
뒤따라갈게, 뒤따라갈게, 소리치다
집으로 달아났다
텅 빈 집에는
숲이 불타고 있다는 뉴스 소리만
사라질 것들을 베껴 그리려고 했으나
스케치북은 어디에도 없었다
식물도감도 없었다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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