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 3/19 (월), 무림고수 

 

 

  『어린이를 위한 흑설공주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인 이 일기는 내용만 본다면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나름 당찬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보인다.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동화를 재해석한 책을 읽고 쓴 독후감으로, 일기의 첫 부분에서는 독서를 통해 얻은 새로운 시각으로 기존 동화 속의 수동적인 주인공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꽤 주관적 평가의 강도가 강한 이 글에서, 특히 한 줄에 ‘나는 그게 싫다.’, ‘바보들이다.’라고만 쓰고 문장 뒤에 긴 공백을 남긴 것은 어떤 강렬한 감정을 담아 자기 생각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반의 동화 속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 뒤이어서는 현·구 사회에 대한 논평을 이어나간다. 현재 남자 군인만 있는 것은 남녀차별이고, 옛날에 여자들이 집 밖에도 못나간 것 또한 부당하다. 마지막으로 동생의 취향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불평등이 자신의 일상과도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근거를 든다. 반박할 지점이 많은 글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단호하고 감정적인 문장과 마지막 문장들의 커다란 글씨와 느낌표로 당시 시대의 남녀평등 성립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는 글이라고 결론을 지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이 일기를 읽어보자 뭔가 수상한 느낌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 19일 날짜의 일기를 고른 것은 이 일기를 주제로 어떤 글을 풀어나갈 수 있겠다는 계획 있는 선택이 아니라 이번 주 업로드 날짜를 최대한 뒤로 잡기 위해서였다(일기는 과거의 그 날과 같은 날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 때문에 어떤 에피소드도 없고 직설적으로 생각을 주장하기만 하는 이 글로부터 현재에 이어 쓸 만한 지점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어렸을 적 동생의 취향에 대해서 써야하나, 당시 철없는 저 페미니스트적 주장과 지금 나의 변화에 대해서 써야 하나. 그렇게 곤란해하면서 일기를 몇 번 읽어보았다. 그러자 이 당차게 주장하는 글이 과연 어떤 이유에서 저런 강조가 많은 타이포그래피를 구상하며 큰소리를 쳐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한 줄에 ‘바보들이다’라고 짧은 문장만을 쓰는 대담함은 어떤 어리지만 웅장한 마음에서 나왔던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점점 의심으로 바뀌었다. 다소 짧은 분량 또한 의심을 돋우었는데, 어떤 맥락에서 이 일기를 쓰게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보통 어느 정도 스스로 쓸 의향이 있었던 일기들은 두 페이지를 넘기도 하고, 한 문장이 한 줄의 중간에서 끊겼어도 다음 문장을 바로 같은 줄에 붙여서 쓴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일기는 한 페이지를 겨우 채울뿐더러, 다시 보니 다양한 근거를 나열하는 듯하지만 사실 그때그때 생각이 나는 짤막한 소재들로 글을 때워가며 이어나갔다는 흔적이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 줄에 한 문장을 쓴다는 강조에 유용한, 그 타이포그래피의 다른 장점이 다시 떠올랐다. 적은 문장으로 한 페이지 분량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일기의 대담한 타이포그래피는 자신의 페미니스트적 주장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 일기의 분량의 채워내고자 안간힘을 썼던 이의 당당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두 문장에서 글씨가 갑자기 커진 이유도, ‘세상은 공평하고’, ‘여자들도 꿈을 이룰 수 있다’라는 (그 당시에 스스로 저 문장을 쓰면서도 느꼈을) 그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한 믿음이 아닌, 짧은 분량으로 비어 보이는 글을 메꾸어 보이고자 한, 그러한 의도로 커다란 느낌표를 그려 넣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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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파이시 만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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