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쓰기 1-1 서울식물원] 식물원의 오후
- 첫 번째 공간 : 서울식물원
[식물원의 오후], 데킬라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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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식물원은, 비 오는 날 가야 해요.
그 말 때문에, 서울 식물원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비 오는 날 가야 하는 식물원이란 어떤 걸까. 계속 궁금했는데, 정작 서울 식물원을 방문한 건 그 얘기를 들은 날로부터 이 년이 넘게 지난 후, 그것도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온실 앞에 몇 미터나 늘어선 줄에 비하면 매표소에는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 매표시간까진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매표소는 온실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있었는데, 길게 늘어선 대기줄이 있으면 그 근처로는 아예 접근도 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하마터면 매표소를 찾느라 한참을 헤맬 뻔했다.
티켓을 사고는 거대한 온실 건물을 뱅 둘러 지나치고 그대로 야외 정원으로 들어갔다. 바코드에 티켓을 인식시키고, 버벅대며 작동하는 문을 통과해서. 센서가 작동하고 있긴 하는 걸까. 입구 한켠에 마련된 작은 초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게이트 여는 버튼을 일일이 누르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문은 제멋대로 열렸다 닫혔다 들쑥날쑥이었다.
여러가지 주제로 꾸며놓았다고 해서 주제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야외 공간은, 이름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잘, 깔끔하게, 정갈하게. 누가 봐도 잘 손질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식물들이 어딘가 기묘했다.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풀들과 흙, 반듯하고 안정적으로 쌓인 돌들. 바닥이 보일 정도로 얕고 깨끗한 도랑에는 철제로 된 다리가 긴 새들이 서 있었다. 수련은 멀찍이 떨어져 한 송이씩.
정원을 따라 들어오다보니 오른편에 서 있는 한옥집이 보였다. 밝고 세련된 색의 목재였다. 터가 낮아, 마루에 걸터 앉아도 정원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넓은 풍경을 보려면 집 뒤로 솟아 있는 야트마한 언덕을 올라야 했다. 아직 줄기가 가느다란 나무들 사이로 정원 너머의 호수가 보였다. 잘 포장된 호수 주변의 산책로가 식물원의 풍경과 비슷했다.
정원 안의 것들이 더 이상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은, 멀리 네모 반듯하게 나란히 서 있는 통유리 건물 네 채를 봤을 때였다.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던 식물원 안의 풍경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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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로 들어가려는 줄은 여전히 길었다. 어차피 마감 시간도 길게 남지 않았으니 느즈막하게 대기 행렬에 합류해보기로 했다.
일회용 컵에 든 음료는 반입이 되지 않았다. 아직 가득 채워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손에 든 채 서 있는 사람들은 주의사항을 듣고 당황해했다. 뒷줄에 서 있던 남자는 반쯤 남은 음료를 들고 쓰레기 통으로 향했다.
온실로 들어가면 얼굴로 끼쳐오는 습하고 무더운 공기,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그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코로 들어오는 눅눅한 온도도, 간간히 떨어지는 물소리도 없이. 사람소리와 스피커에서 나오는 새 소리만이 온실을 채우고 있었다. 좁은 길 위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사진을 남기느라 잠시 길 위에 멈춰선 사람들은, 카메라 각도를 잡고 있는 이들을 재촉했다.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러진 식물을 보려 고개를 들었을 때는 공중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열대관을 지나면 온난한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나왔다. 선인장들부터 유럽이나 터키에서 자라는 식물들까지.
땅과 가까워진 태양이 온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선인장들 위로 불그스름한 빛이 퍼졌다. 마치 사막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은 몇 초만에 깨졌다. 선인장들을 가둬 놓은 돌담이 바로 내 발치에 있었다.
출구로 가려면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다. 발 아래에는 열대관의 풍경이 펼쳐졌고, 끊임없이 귀를 울리던 새소리는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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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장까지 십 분 정도 남았을 때 온실을 나왔다. 정원을 가로질러 식물원의 반대편 출구로 갔다. 더 이상 티켓이 필요 없는 공간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할 수 있는 일반 공원이었다. 얕은 도랑을 따라가다보니 멀리 호수가 보였다. 정원 안에서 보았던 그 호수였다.
비 오는 날, 서울 식물원의 그 호수를 꼭 가보고 싶었어요.
친구가 어째서 비 오는 날의 서울 식물원을 이야기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엔 호수를 둘러싼 도로도, 시퍼렇게 번쩍이는 건물들도 모두 빗물에 가려질 테니까.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 나란히 세워진 기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줄기를 맡기며 움직였다. 바람이 잔가지와 잎들을 거치며 시원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첫 번째 공간 '서울식물원', 두 번째 타자는 믹스키트입니다.